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이명수의 사람그물] 의자놀이 강권하는 사회

등록 2012-07-30 19:20

이명수 심리기획자
이명수 심리기획자
귀족이 노예에게 있는 힘껏 달리라 명령한다. 그 뒤에선 귀족의 어린 아들이 활을 겨냥하고 있다. 열 발을 쏠 동안 잘 피하면 살 수 있고 그러지 못하면 죽는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 이유는 간단하다. 왠지 아침이 꿀꿀한 귀족 아들의 기분전환을 위해서다. <문화방송>이 ‘피디수첩’ 작가 6명 전원을 해고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문득 이런 야만의 풍경이 떠올랐다. 상상과 비유가 지나친가. 아니다.

문화방송 사쪽이 ‘피디수첩’ 22년 역사상 처음이라는 잔혹극을 벌이면서 내세운 이유도 간단하기는 마찬가지다. 파업 후 꿀꿀해진 시사제작국의 분위기 쇄신을 위해서라나. ‘피디수첩’ 경력만 4~12년인 베테랑 작가 6명 전원을 해고한 이유가 그렇다. 개념 상실이다. 본심을 감추기 위한 막말이라 해도 누군가의 밥줄을 끊으면서 또 오랜 인연을 정리하면서 ‘분위기 쇄신 차원’이라고 말하는 그 후안무치와 무지는 끔찍하다. 아들의 기분전환을 위해 노예에게 죽음의 달음박질을 강요하는 이들과 무엇이 다른가.

언론의 사명과 자유를 짓밟는 행위라는 공적 영역의 날 선 비판조차도 나에겐 뒷전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곳에선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힘이 없는 이들에게 이런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른다고 느껴서다.

프리랜서로 방송사에서 고용 형태가 가장 취약한 방송구성작가를 겨냥한 문화방송 사쪽의 행태는 잔인하고 비열하다. ‘피디수첩’ 작가들은 해고통보조차 본인이 직접 듣지 못했다. 타 방송사에 있는 동료 작가들이 전화를 걸어 ‘피디수첩’에서 작가를 구한다는데 누가 나가느냐고 물어서 알았단다. 자신이 속한 집단으로부터 배제당한다는 사실을 그런 식으로 알게 되는 이들의 심정을 한번이라도 헤아려 봤다면 절대 그렇게는 못한다. 휴대전화 문자로 해고통보를 해서 지탄을 받았던 어느 회사가 그나마 인간적으로 보일 정도다.

모든 사람은 누군가와의 관계에선 상대적 약자가 되기 마련이다.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누군가의 마음에 비수를 꽂으면 다른 관계에선 자신이 분위기 쇄신을 위해 정리되어야 하는 당사자가 된다. 토사구팽의 의미와는 좀 다른 어쩌면 의자놀이에 가까운 구조다.

사람 수보다 의자 수를 적게 놓은 채 빙빙 돌다가 신호가 떨어질 때 의자를 차지하지 못하는 사람이 탈락하는 게 의자놀이다. 현대사회의 의자놀이에선 시간이 갈수록 의자의 개수가 점점 준다. 7개에서 5개에서, 이젠 2개까지 줄었다는 느낌이다. 10명 중 8명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어차피 앉을 수 없다. 앉을 수 없는 이들끼리 상처내고 상처받는 악순환의 구조다. 의자놀이의 관점에선 이번 ‘피디수첩’ 해고사태와 쌍용차 사태 등이 조금도 다르지 않다.

다음주 의미있는 책 한 권이 세상에 나온다. <의자놀이>라는 책이다. 2009년 쌍용차 2646명의 해고 발표 이후 시작된 77일간의 옥쇄파업과 그 후 22번째 죽음까지의 아린 과정을 작가 공지영이 심호흡을 해가며 르포 형식으로 기록했다. 지옥 같은 의자놀이를 강권했을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 우리 모두의 의자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를 함께 고민해보자는 절박한 권유다.

의자놀이를 강권하는 사회에서 모두가 살아남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내가 먼저 그 의자놀이를 거부하면 된다. 나는 특수한 경우라서 어쩔 수 없다고 핑계 대지 않으면 된다. 이 방법으로는 결국 그 의자에 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면 된다. 그런 죽음의 놀이에 동원되어도 괜찮은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살갗으로 느끼면 된다. 그다음 단계의 현실적 해법은, 이원재나 윤석천 같은 통찰력 있는 경제학자들이 답해 달라.

이명수 심리기획자, 트위터 @meprism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