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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폭력의 냄새가 밴 자동차 / 박용현

등록 2012-08-19 18:45

박용현 사회부장
박용현 사회부장
“나는 마이애미에서 열리는 무역박람회에 참석해 임직원의 주머니에서 어떠한 것도 슬쩍할 수 있습니다. 여섯달 안에 그 회사가 파산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문서를 빼돌린 다음, 집에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푹 잠들 수 있습니다.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요. 비즈니스일 뿐이니까요.”

조엘 바칸이 쓴 <기업의 경제학>(원제 ‘기업: 병적인 이윤과 권력 추구’)에 소개된 기업 스파이 마크 배리의 말이다. 교묘한 방법으로 기업의 내부정보를 빼내 파는 게 직업인 이 사기꾼의 뻔뻔한 말에 많은 이들이 공분할 것이다. 그런데 배리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또다른 이유는 “자신을 고용한 기업 간부들보다는 자신이 도덕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그는 ‘하청’을 받아 비즈니스를 했을 뿐이다. 수요가 없으면 그의 업종은 존재하지 않았을 터, 진짜 악당은 병적인 이윤추구를 위해 배리 같은 자에게 일감을 주는 부도덕한 기업들인 셈이다.

자동차부품회사 에스제이엠(SJM)에서 노조원 폭행 사건이 일어난 뒤 일차적인 공분은 용역경비업체 컨택터스에게 쏠렸다. 하지만 용역업체들 역시 마크 배리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 수십억원짜리 일감을 던져주는 기업이 없다면, 용역직원들이 노동자들을 잔혹하게 폭행하는 야만의 풍경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배리는 말한다. “업계에서 내 별명은 ‘연’입니다. 경영자들은 나를 연처럼 하늘에 날려 원하는 정보를 얻은 다음, 비구름이 몰려오면-검찰이 수사하거나 상대 기업이 소송을 걸면-연을 자르고 도망칠 수 있습니다.” 노동 현장에서 용역폭력이 왜 자꾸 되풀이되는지도 이 ‘연 이론’으로 설명된다. 폭력 사태가 벌어져도 용역직원들만 처벌(그것도 가벼운 벌금 정도)받고 말 뿐, 이들을 고용한 기업주는 제대로 대가를 치른 적이 없다. 줄이 끊어진 연은 잠시 방황하다 다시 어떤 기업주의 부름을 받는다. 폭력의 엔진이 꺼질 수 없는 구조다. 그래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최근 법정구속된 일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법의 관용을 기대하기 힘들어지면 기업인들이 불법을 대하는 무감각한 태도도 달라질 터이다.

기업의 타락을 막는 기제는 소비자와 투자자의 윤리적 선택을 통해서도 작동한다. 현대의 많은 기업들이 브랜드 이미지에 대한 타격을 우려해 인권·환경·정의 등의 가치를 경영에 접목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에스제이엠과 같은 부품회사는 직접 소비자를 만나지 않기에 이런 필요성을 상대적으로 덜 느끼게 된다. 이런 경우 부품을 납품받는 ‘원청’ 대기업으로 하여금 책임을 분담하게 하자는 게 국제사회의 원칙으로 자리잡고 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규범을 제시한 유엔의 ‘기업과 인권에 관한 지도원칙’이나 ‘글로벌 콤팩트’ 등은 대기업이 원료 구매처, 하청업체 등을 포함한 생산의 전 과정(Supply chain)에서 인권침해나 노동탄압, 환경오염 등을 방지하는 노력을 기울이도록 규정하고 있다. 삼성전자에 납품하는 중국 에이치이지(HEG)전자에서 아동노동이 확인되자 삼성 쪽이 적절한 조처를 하겠다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에스제이엠 폭력 사태도 그저 경기도 안산 반월공단의 한 공장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이곳에서 나오는 부품으로 완성차를 만드는 대기업들이 함께 부끄러워하며 대처해야 할 문제다.(에스제이엠 누리집에 가면 ‘고객’ 명단에 낯익은 자동차 로고들이 눈에 띈다.) 그날 새벽 공장 안을 날아다니며 노동자들의 피를 튀게 한 금속체들이 우리가 타는 자동차에 장착돼 폭력의 냄새를 독한 매연처럼 풍기게 될 테니 말이다.

박용현 사회부장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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