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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어게인 2002’는 없다 / 강희철

등록 2012-09-26 19:13

강희철 오피니언넷부장
강희철 오피니언넷부장
옛말에 천고마비라더니 가위 경마의 계절이다. 가장 오래 출전을 준비해온 1번 말이 먼저 경마장에 들어서고, 딱 10년 전 선배 경주마의 우승을 지켜본 2번 말이 뛰어들어 흥미를 돋우더니, 3번 다크호스까지 출사표를 던진 뒤론 승부 예측이 로또의 경지에 접어들었다.

이 와중에 진보와 보수를 가릴 것 없이 전 언론이 기정사실처럼 다루는 주제가 하나 있다. 2번, 3번 말의 단일화다. 둘이 나란히 경주에 나섰다가는 1번 말 좋은 일만 하게 생겼으니, 종국에 어느 쪽이든 접어야 승산이 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질문을 하나 던져보기로 하자. 명색 제1야당이 출전시킨 2번 말은 왜 3번 말의 ‘양보’를 전제로 하지 않는 한 1번 말과 겨루기 힘든 역부족의 처지에 놓이게 된 걸까?

해답의 실마리는 머지않은 과거에 있다. 지난 4월 총선을 앞두고 민주통합당은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공사 반대에 심혈을 기울였다. 총리 재직 당시 “대양해군을 육성하고 남방항로를 보호하기 위해선 해군기지 건설이 불가피하다”(2007년)고 목소리를 높였던 당 대표 한명숙은 강정마을까지 내려가 그 공사를 거침없이 성토했다. 그러나 5년 전 ‘불가피’론에서 왜 ‘불가’론으로 돌아섰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집권 당시의 판단이 옳았다면 제주 지역구를 모두 잃는 한이 있더라도 지켰어야 했고, 해군기지 반대가 확고한 새 소신이라면 소속 의원들이 배지를 모두 던져서라도 막았어야 했다. 그러나 민주통합당은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 총선이 끝나자마자 ‘강정마을’은 한철 입고 마는 패스트패션처럼 그 당의 관심권 밖으로 버려졌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도 비슷한 경로를 밟았다. 협상에 시동을 건 것도, 협정문에 이름을 새긴 것도 노무현 정부였다. 당시 그 뒤를 받쳤던 민주통합당은 지난 4월 총선을 앞두고는 이 협정의 비준 무효와 전면 재검토를 외치며 미국에 발효 중단까지 요구하고 나섰다. 그런데 협정 체결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던 문재인은 지난해 ‘나꼼수’에 나가서는 “결단코 반대”라더니, 총선 이후인 7월엔 “우리가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이니 통상 개방정책이 필요하다”며 “비준됐으니 준수돼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통합당은 그를 대통령 후보로 뽑았다.

이 역시도, 무역으로 먹고사는 우리의 처지를 살폈다면 덜컥 비준 무효 현수막부터 펼쳐들 일이 아니었고, 협정이 아니라 나라를 들어먹는 협잡이라면 할복이라도 할 각오로 막았어야 했지만, 그들의 선택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정치공학적 필요에 따라 정책과 방침을 수시로 바꾸고, 일도양단하기 어려운 입체적 쟁점들을 곰팡내 나는 이분법으로 재단하는 이들의 행태는, 무능한 진보를 넘어 ‘무늬만 진보’임을 자백한 셈이다. 그러니 그 당의 후보가 가상 3자 대결에서 꼴찌를 면치 못하고, 스스로를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유권자 지지도에서 변변한 정책 공약집 하나 없는 안철수에게 뒤지는 것은 일견 당연한 귀결로 보인다.

모두가, 심지어 보수언론조차 민주통합당의 승리를 점친 4월 총선에서 그 당은 죽을 쒔다. 유권자들이 꺼내든 ‘옐로카드’였다. 그런데 그런 물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당의 대표는 요즘도 단일화와 ‘어게인 2002’만 주문처럼 외고 있다. 진보 또는 야권 성향 유권자들의 사표 걱정과 ‘전술적 고려’를 볼모로 잡으려는 ‘미워도 다시 한번’ 전략인 셈인데, 글쎄 그게 이번에도 통할까?

“어게인 2002는 없다.” 자신을 ‘노무현주의자’로 부르는 이병완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4월 총선 직후 민주통합당을 겨냥해 “새 시대엔 새로운 비전을 보여줘야 한다”면서 한 말이다.

강희철 오피니언넷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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