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현 사회부장
우리는 종종 길에서 멈춰선다. 반가운 얼굴과 악수하기도 하고,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기도 한다. 애타는 몸짓과 목소리에 발목 잡혀 얼마의 시간을 내주기도 한다. 머지않아 우리는 구세군 종소리에 발길을 멈추고 빈곤한 이웃과 연대하는 의식도 치를 것이다. 길은 그저 ‘다니는’ 곳이 아니라 세상과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교통이 아닌 소통이라는 길의 용도에 주목한 것은 미국 연방대법원이었다. 애초 길은 정부의 소유물이므로 길을 자기주장을 펴는 용도로 사용하는 행위는 얼마든지 규제할 수 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1939년 판결(Hague v. CIO)에서 연방대법원은 이런 인식을 180도 바꿔, 길은 정부에 관리를 맡겨 놓았을 뿐 본질적으로는 시민의 소유물이라고 선언한다.
“길은 아득한 옛날부터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장소였고,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생각을 나누고 공공의 관심사를 토론하는 장소였다. 이는 고대로부터 시민의 특권이요, 권리요, 자유였다.”
1960년대에 이르면 차도·인도·공원 등의 장소는 ‘퍼블릭 포럼’(공공의 토론장)이라는 이론이 정립된다. 특히 언론 매체에 광고를 내거나 그럴듯한 장소를 빌려 집회를 열 돈이 없는 이들에게 이 공간은 사실상 유일하게 자신의 뜻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장소라고 했다. 따라서 이곳에서 이뤄지는 표현 행위를 규제할 때는 그에 필적하는 ‘대체 표현수단’이 보장돼야만 한다는 게 연방대법원의 판단이다. 또 의견의 ‘내용’에 따라 규제 여부가 결정되면 정부가 원하는 의견들만 거리를 메우게 될 테니, 이런 규제는 철저히 위헌으로 취급된다.
서울 덕수궁 대한문 옆 인도에 자리잡은 몇 채의 농성 천막(함께살자 농성촌)을 철거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쌍용자동차 해고 사태, 용산참사, 제주 해군기지, 밀양 송전탑과 원전 등 그 중요성에 비해 사회적 관심도에서 소외된 문제들이 농성의 주제다. 그런데 농성 천막을 걷어내는 이유가 그저 불법 적치물로 인한 보행 방해라고 한다. 도로의 한켠만 차지할 뿐인 천막이 실제 보행에 정체를 유발하지 않는다는 점은 제쳐두더라도, ‘퍼블릭 포럼에서 행해지는 의사표현’이라는 본질이 존중받지 못한 채 진행되는 천막 철거는 그 앙상한 논리로써 우리 사회의 수준을 반영하는 듯하다.
따져보자. 천막을 철거하면 이들에게 ‘대체 표현수단’이 있을까? 농성자들은 영하의 길에서 잠을 자며, 40일씩 단식을 하며, 이렇게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절박함을 표현하고 있는 중이다. 아무리 거액을 쥐여준들 그 일을 자청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이처럼 천막농성 자체가 절박함의 표현에서 본질적인 부분을 이루고 있다. 과연 이를 대체할 표현수단을 찾을 수 있을까.
천막 철거가 표현의 ‘내용’에 따른 규제는 아닐까? 겉으로는 불법 적치물 철거라는 중립적인 이유를 내세우지만, 농성자를 ‘전문 시위꾼’ 따위로 폄하하는 논리가 철거 분위기를 촉발한 사실을 상기할 때, 농성자의 주장에 대한 호불호가 철거의 내적 동기를 이룬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보이기 창피하다는 이유를 들기도 하는데, 이는 천막농성의 표현 내용이 철거의 동기라는 의구심을 더욱 키운다.
절망하는 이들이 절박하게 세상과 소통하려 하는데, 정부는 그 절박함을 해결하기는커녕 소통의 수단 자체를 길에서 쓸어버리겠다고 한다. 추위에 떠는 막바지 낙엽들이 그 길에 뒹군다. 걸음을 멈추고 생각한다. 길은 저 낙엽처럼, 영화 속 잠파노와 젤소미나처럼, 추락하는 존재들에게 하늘이 선사한 마지막 신성한 거처가 아니던가.
박용현 사회부장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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