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현 사회부장
선거 때만 되면 ‘죽지도 않고 또 오는’ 각설이처럼 나타나는 이들이 있었다. 후보 캠프에 찾아와 ‘표를 모아 주겠다’며 흥정을 걸었다. 선거 브로커들이다. 얼마나 실효가 있을지 알 수는 없어도, 한 표가 급한 후보 처지에선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라고 했다. 10여년 전에 들은, ‘돈 선거’가 만연하던 시절 이야기다.
이제 그런 일은 당연히 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직도 바꿔야 할 게 많은 정치판이라지만, 최소한 그 정도로 저열한 수준은 벗어나지 않았겠냐는 믿음이 있었다. 더구나 선거운동이 조직 동원이나 세몰이를 주된 수단으로 삼던 시대는 가고,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의 촘촘한 소통망이 선거운동의 주무대로 등장한 지 오래지 않은가.
하지만 너무 안일한 믿음이었다. 세상에 진화하지 않는 존재는 없는 법. 세균이 항생제에 대한 내성을 키우며 진화하듯, 선거 브로커의 소질을 가진 사람들 또한 변화하는 선거문화에 적응(?)하며 살아남지 말란 법은 없다. 선관위가 13일 서울 여의도의 한 오피스텔을 급습해 ‘에스엔에스(SNS) 불법 선거운동’ 현장을 적발했다는 소식은 진화한 ‘사이버 선거 브로커’의 등장을 알리는 음습한 서곡처럼 들린다.
새누리당 중앙선대위의 에스엔에스미디어본부장이라는 직함을 가진 이가 비싼 오피스텔에 사무실을 차리고 직원들을 고용해 상대 후보를 비방하는 인터넷 댓글과 트위트를 날리며 불법 선거운동을 벌였는데, 여기에 당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걸 믿을 수 있을까. 오피스텔에서 무더기로 발견된 박근혜 후보 명의의 임명장은 또 무엇인가. ‘당에서 공식적으로 자금을 지원한 적이 없다’는 게 새누리당의 주장이지만, 선거 브로커에게 ‘공식적으로’ 자금을 지원하는 정당이 있었던가. 새누리당 선대위의 국정홍보대책위원장과 수석부위원장 직함을 가진 이가 오피스텔 임차료를 댔다는 선관위 발표까지 나온 마당에, ‘당과 공식적 관련성이 없다’는 새누리당의 주장은 너무나 얄팍한 변명으로 들린다.
그뿐만이 아니다. 16일 <한겨레> 취재 결과, 여의도의 또다른 사무실에서도 이와 비슷한 형태의 불법 선거운동이 벌어진 정황이 드러났다. 이것도 ‘지지자들의 돌출행동’이라고 할 건가.
설령 그런 변명을 곧이곧대로 믿는다 해도, 절망은 가시지 않는다. 박근혜 후보의 열렬한 지지자들이 ‘위험한 생각’을 가진 집단이라는 결론에 이르기 때문이다. 구태 정치를 깨고 자발적 소통이라는 새로운 정치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사이버 공간에서 물량공세로 여론조작을 시도했다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적대행위에 다름 아니다. 21세기형 민주주의를 꽃피울 최적의 자양분인 소셜네트워크를 최악의 독극물로 오염시킨 행위다.
그런데도 박근혜 후보가 이들의 행동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는 점에서 절망은 더욱 깊어진다. 박 후보는 14일 ‘흑색선전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이 땅에 다시는 음습한 정치공작과 허위 비방이 나타나지 못하도록 이를 단호히 분쇄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그래 놓고 정작 자신의 지지자들이 저지른 흑색선전과 여론조작에는 관용을 베푼다면, 박 후보의 새정치는 길을 잃고 헤매게 될 것이다. 새정치의 요체가 깨끗한 정치, 소통의 정치라고 할 때, 오피스텔에서 이뤄진 에스엔에스 불법 선거운동은 그 둘 모두를 철저히 부정하는 구태정치의 표본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박 후보가 당선될 경우 저런 열성 지지자들이 득세하고 더 충성스럽게 여론조작을 일삼게 되지 않겠냐는 시민들의 우려에도 박 후보는 답해야 한다. 투표일까지는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박용현 사회부장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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