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 콘텐츠평가실장
말은 명료함이 부족하고 소통의 공감이 충분하지 않다. 투표일을 하루 앞둔 이번 대선에서 두 후보는 모두 한계를 보였다.
담론의 주제는 분명하다. 복지 확대, 경제민주화, 일자리 늘리기, 양극화 완화, 새로운 정치, 권력기관 개혁, 사회통합, 한반도 평화 등이 그것이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는 물론이고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도 그 속에 머물렀다.
이들 담론은 모두 개혁·진보적인 성격이 강하다. 한마디로 확실하게 개혁·진보를 추구하는 것이 지금의 시대적 과제다. 그러나 여야 후보의 차이는 생각보다 명쾌하지 않다. 박근혜 후보는 개혁·진보 분위기에 슬그머니 편승했고, 문재인 후보는 뚜렷한 차별화에 성공하지 못했다. 복지·양극화·새 정치·한반도 등의 의제에서 보여준 박 후보 쪽의 중도적 수사가 일정한 ‘물타기’ 효과를 거둔 셈이다.
만약 박 후보가 이긴다면 자신의 말을 실천할 수 있을까?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2000년 대선에서 ‘온정적 보수주의’라는 중도적 이념을 내걸고 가까스로 당선된 뒤 금세 강경보수로 돌아섰다. 이명박 정권도 비슷하다. 이 대통령은 대선 때 대체로 중도 기조를 유지했으나 집권 이후에는 강경보수 세력을 주된 권력기반으로 삼았다.
중도층을 겨냥한 공약이 늘어나는 것은 현대 선거의 공통된 특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대의 과제와 집권세력의 성격이 어긋나면 두고두고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16년여 만에 직선제가 부활된 1987년 대선 때가 그랬다. 당시 시대정신은 민주화였고, 오랫동안 민주화 투쟁을 해온 정치세력이 정권을 잡는 게 순리였다. 실제로는 ‘양김’으로 불리던 김영삼·김대중 후보가 분열하면서 군사정권의 맥을 잇는 노태우 후보가 승리했다. 이후 민주화와 새 정치 실현이라는 과제가 왜곡돼 국민과 나라에 큰 부담이 된다. 대선의 문제점은 1990년 3당 합당으로 이어졌고, 이때 구축된 정치구조는 지금까지도 우리 정치의 질곡으로 작용하고 있다.
1930년대 초반 대공황 이후 서구 나라들은 예외 없이 복지국가 구축에 나섰다. 그것이 위기를 극복하는 거의 유일한 길이었다. 이후 복지체제의 진전과 더불어 중산층이 대규모로 형성되고 서구 자본주의는 20여년 동안 유례없는 번영기를 누렸다. 국민의 삶의 질 향상과 경제 활력이 선순환하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복지 확대는 그 자체가 목적이지만 건강한 경제의 기반이기도 했다. 당시 서구 나라들이 복지국가를 외면하고 반대로 나아갔더라면, 사회통합의 실패는 물론이고 민주주의 자체가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섰을 것이다.
지구촌 전체로 볼 때 지금 상황은 당시의 대공황과 비교된다. 낙관적인 전문가들조차 적어도 몇해 동안 고난의 시기가 이어질 것으로 본다. 우리는 이미 60년 이상 이어진 분단체제를 평화적으로 극복해야 하는 과제까지 안고 있다. 이런 시기에 치러지는 대선을 통해 개혁·진보 의제들을 실현하기 위한 틀을 만드는 일은 민족사에서나 세계사 차원에서나 큰 의미가 있다.
시대의 과제와 정치세력을 일치시키는 것은 그래서 더 중요하다. 그러지 못할 경우 불통이 심해지고 모순이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지금은 ‘87년 체제’를 대체할 ‘2013년 체제’를 만들어가야 할 시기다. 쏟아져나온 말과 담론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그 내용뿐만 아니라 주체의 성격과 시대의 과제라는 큰 맥락을 함께 봐야 한다. 개혁·진보라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것이 좋다.
김지석 콘텐츠평가실장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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