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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명수의 사람그물] 헬프 미

등록 2012-12-24 19:11

이명수 심리기획자
이명수 심리기획자
심리검사를 해석하다 보면 ‘헬프 미 징후’가 두드러지는 경우가 있다. ‘헬프 미 징후’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닥친 위험을 느낀 이가 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누군가에게 보내는 구조신호다. 본인은 또렷하게 감지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말 그대로 제발 나 좀 도와달라는 신호다. 검사를 해석하는 전문가들은 이런 신호가 감지되면 긴장한다. 그 신호에 집중해서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면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달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선이 끝나자마자 노동자 두 명이 잇달아 목숨을 끊었다. 복직은 했지만 사쪽의 158억원 손해배상소송에 시달리던 한진중공업 노동자는 목을 매고, 사내하청 노동자로 회사의 폭력진압으로 인한 스트레스성 장애에 시달려온 현대중공업 해고자는 19층 자신의 아파트 베란다에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어떤 이들에겐 느닷없는 일로 느껴지겠지만 갑자기 벌어진 일이 아니다. ‘헬프 미 징후’가 지속적으로 외면당한 결과 벌어진 필연적 현상이다. 문제는 이런 끔찍한 일들이 이번으로 끝날 것 같지 않다는 데 있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의 진단에 의하면 죽음의 번호표를 들고 대기하는 현장처럼 자살하려는 노동자가 계속 나올 수도 있다. 누군가는 그에 대해 죽음을 부추기는 선동적 진단이라고 삐딱한 시선을 보내기도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지금 상황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 내내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들은 토끼몰이에 쫓기듯 벼랑으로 내몰렸다. 그들이 보내는 다급한 구조신호는 철저히 외면당하거나 주목받지 못했다. 쌍용차 정리해고로 3년 동안 23명의 해고자와 가족이 목숨을 잃었지만, 그런 기네스북에 오를 상황조차 심드렁해하거나 짜증으로 받아들이는 정도이니 더 말할 게 없다.

헬프 미 징후를 외면해서 생때같은 목숨들이 허공으로 사라지는 파국적 상황을 맞았는데도, 모든 노동자가 힘들다고 죽는 건 아닌데 왜 계속 자살질이냐는 악마적 비아냥까지 등장한다. 힘없고 벼랑에 선 노동자들은 탈진한 지 이미 오래다. 그러니 그런 상황이 개선되지 않은 채 그대로 연장될 것이라고 여겨지는 선거 결과에 절망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지금 노동자들은 쫓기고 쫓기다 이제 옥상으로까지 밀려 올라와 턱밑에서 치받는 지옥 같은 불길을 바라보는 형국이다. 발을 동동 구르며 다급한 구조신호를 보내는데 더는 희망의 징후가 안 보인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반재벌 정책을 표방하는 정권이 들어서 재벌들의 헬프 미 징후를 외면한 결과로 재벌 회장들이 잇따라 음독하고 목을 매고 투신한다면 그 정책들은 재고되어야 마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죽어도 된다고 냉소적으로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개별적 존재로서 벼랑 끝에 몰린 인간의 절박함은 권력의 유무나 재산의 많고 적음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 절박한 이는 누구라도 보듬고 다독이는 게 맞다.

땅속에 매몰되거나 난파선에서 고립된 이들에 대한 구조작업에 난관이 생길 경우에도 일단 그들에게 현재의 상황을 알려주고 희망의 메시지를 주어야 끝까지 버텨낼 수 있다.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지금 박근혜 당선인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노동문제를 가장 중요한 정책으로 선정해 달라는 것이 아니다. 잇따른 죽음을 막기 위해서 지금 가장 시급한 현안으로 생각해 달라는 것이다. 단지 박근혜 당선인이 그런 의지를 밝히는 것만으로도 예고된 죽음을 막을 가능성이 있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권력은 그런 때 쓰기 위해 잡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살려 달라! 박근혜 당선인은 지금 그럴 충분한 능력과 의무가 있다. 살려 달라.

이명수 심리기획자, 트위터 @mepr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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