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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동흡 지명’ 박정희도 흐뭇해했을 딸의 선택

등록 2013-01-06 19:26수정 2013-01-07 16:02

김의겸 정치·사회 에디터
김의겸 정치·사회 에디터
[편집국에서] 보수의 ‘적통’ 이동흡 / 김의겸
1968년 전방에 근무하던 박 상병은 통나무를 트럭에 싣고 가다 운전병의 실수로 추락해 사망하고 말았다. 유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고, 1·2심 모두 이겼다. 그러나 국가는 “박 상병은 순직한 것이니, 국가배상법에 따라 국가가 배상하는 것 말고 별도로 민사소송을 낼 수 없다”며 상고했다. 당시 헌법소송을 맡고 있던 대법원은 1971년 국가배상법을 표결에 부쳐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이 재판은 180만원짜리에 불과했지만, 박정희 정권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베트남전이 한창인 때라, 대법원의 위헌 판결로 참전 피해 용사들의 소송이 봇물 터지듯 일어날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박 정권은 서울지법 판사들이 향응을 접대받았다며 구속영장을 치고, 위헌 판결을 내린 대법관 9명은 모두 잘랐다. 국가배상법은 위헌 시비를 없애기 위해 아예 유신헌법 조문에 집어넣었고, 대법원의 위헌심사권도 빼앗아버렸다.

고릿적 얘기가 떠오른 건, 박근혜 당선인이 사실상 낙점한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때문이다.

헌법재판소 누리집에 가보면, 헌재의 기능을 “국가기관으로 하여금 헌법을 잘 지키도록 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함으로써…”라고 들고 있다. 하지만 이 후보자가 헌재 재판관을 하면서 낸 의견을 보면, 일관되게 국가주의가 읽힌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국민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언제든지 무시할 수 있다는 논리 말이다. 박 정권이 “달러를 벌어들이는 베트남전을 위하여”를 외치며 사병의 핏값을 깎은 거나, 이 후보자가 미네르바 사건에서 “국가 공공질서의 교란을 방지하기 위해”라고 주장하는 거나 생각의 흐름은 마찬가지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딸의 선택에 흐뭇해했을 것 같다.

또 이번 인사는 헌법 안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경제민주화’ 조항의 숨통을 끊어놓는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김종인이 토사구팽되면서 이미 예정된 수순이긴 하나, 6년 임기가 보장되는 이동흡 헌재에서는 헌법 제119조의 의미를 최대한 쪼그라뜨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동흡의 이런 보수성향이 나름의 철학적 기반을 갖기보다는 이해관계에 민감한 ‘후각’의 결과물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다. 이 후보자가 지명되자 법원 판사들 사이에서는 “보수, 진보를 떠나 역대 최강의 벙커가 출세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는 탄식이 터져나왔다. 벙커란 판사들끼리 쓰는 은어로, 좀처럼 벗어나기 힘든 부장판사를 일컫는다. 대개는 일 욕심이 많아 배석판사를 괴롭히는 경우이지만, 요즘은 여러 유형으로 발전하고 있다. ‘문화형 벙커’는 음악회 등 취미 생활을 같이 할 것을 요구하는 부장판사이고, ‘생활 밀착형 벙커’는 점심·저녁 식사를 꼭 같이 할 것을 요구하는 부장판사다.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하지만 이 후보자에 비하면 이런 유형들은 애교스럽다. 그의 벙커는 훨씬 끈적거린다. 자신의 출판기념회를 헌재 구내식당에서 열면서 진행을 헌법연구관들에게 맡긴 것은 물론, 마치 출석 점검 하듯이 “직접 와서 책을 받아 가라”고 해 원성을 샀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이강국 헌재소장이 나서서 자제를 당부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국비로 방문한 프랑스에선 가족과 동반여행을 하는 등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 사례도 부지기수다.

이런 모습은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이 있다. 바로 기회주의에서 출발한 한국 보수의 뿌리다. 해방 이후 친일파들이 살아남기 위해, 반공의 기치 아래 똘똘 뭉쳐 보수를 자처하고는 자신의 반대파를 모두 반국가세력으로 몰아 처단한 전통 말이다. 이 후보자가 위안부 문제나 친일 재산 처리에서 친일파 쪽의 손을 들어준 것도 그런 심정적 친밀감 때문이 아닐까?

김의겸 정치·사회 에디터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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