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만 문화·스포츠 에디터
덴마크 영화 <더 헌트>(감독 토마스 빈테르베르)를 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어린아이의 거짓말을 다루고 있다는 기사를 읽고 나서다. 영화 속 음모와 배신엔 늘 거짓말이 끼어 있다. 그런데 어린아이의 거짓말이라면? 난감할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감독은 영화에서 진실이 거짓에 무기력해지는 상황을, 여자 원생 성추행범으로 몰린 유치원 남교사의 시선을 따라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제 호의에 선생님이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아이는 선생님의 발기된 성기를 본 것처럼 유치원 원장에게 말한다.
영화 속 무대는 인권 선진국이다. 그런 나라에서 거짓으로 말미암아 한 인간의 권리가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다. 믿음의 맹목적 속성이란 교양이나 민주적 제도와 같은 문명화 정도와 큰 관계가 없다는 것을 감독은 말하려는 듯하다. ‘어린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게 공동체의 절대 믿음이다. 피해 교사에게 힘을 주는 이는 이렇게 말한다. “어린이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게 지배적 믿음이지. 그래, 대부분의 어린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모든’과 ‘대부분’의 차이를 살필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우리는 정말 지니고 있는지 감독은 묻는다.
영화를 본 뒤 ‘강종헌’이란 이름을 떠올렸다. 지난 24일 서울고법 형사3부는 1975년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13년 동안 옥살이를 한 강종헌씨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강씨는 지난해 4·11 총선에서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18번을 받았다. 진보당 부정선거의 여파로 비례 승계 가능성까지 거론됐다. 이 시점에 강씨와 같이 옥살이를 했고,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의 주역이기도 한 김현장씨의 주장이 나온다.
‘“진보당 비례 강종헌 너 남파 간첩 맞잖아” 김현장씨 공개편지’(<조선일보> 5월15일), “북에 돌아가라 종헌아, 우린 죽었어야 했다”(6월29일), “평양 아닌 홋카이도 갔다고? 남파 간첩 종헌아, 대질하자”(5월19일), “진보당 비례 강종헌, 간첩 아니라면 북 주체사상 3대 세습 입장 밝혀라”(5월21일). 이 자극적이고 일방적인 언설에서 의심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종북주사파가 이끄는’ 진보당을 향한 언론의 성난 공세에 ‘강씨를 둘러싼 사실’은 숨 쉴 틈을 찾기 어려웠다.
한 신문이 굳건하게 믿었던 김씨의 진술에 대해 재판부는 “1997년부터 신한국당, 한나라당 또는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 시장 후보들을 지지하면서 그들을 위한 기자회견이나 유세를 하는 등 피고인 강종헌 또는 피고인 강종헌을 국회의원 비례대표 후보로 공천한 통합진보당과 정치적 입장이나 이해관계를 달리하고 있어” 김씨가 강씨에 대한 정보를 과장하거나 선입견에 따라 진술할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김씨 주장의 일부가 사실무근으로 확인된 점과 30년 전 두 사람의 한 차례 대화에 대한 인간 기억력의 한계 등도 김씨의 증언이 증거능력으로 인정받지 못한 이유들이다. 신문은 무죄 판결을 지면에 싣지 않았다.
고법에서 간첩 혐의를 벗었다는 게, 바로 ‘강씨는 간첩이 아니다’라는 명제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법원은 고문으로 확보한 진술이나 자백이 간첩 혐의에 대한 증거능력을 갖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김용준씨는 엊그제 총리 후보자 직함을 내려놓으면서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한 보도라도 상대방의 인격을 최소한이라도 존중하면서 확실한 근거가 있는 기사로 비판하는 풍토가 조성”되기를 희망했다. 책임 있는 언론이라면 귀담아들어야 할 말이다. 언론이 일방적인 메가폰을 자처해 혹여 거짓이 참을 궁지에 몬다면? 피해야 할 재앙이다.
강성만 문화·스포츠 에디터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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