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레카
초대 대법원장을 맡아 9년3개월 동안 재임한 가인 김병로(1887~1964)는 일제 말기 독립 운동이 어려워지자 10년 동안 농촌에서 농사짓고 닭 키우며 지내다 광복을 맞았다. 건국 과정에서는 분단에 맞서 좌우합작을 추진했고, ‘체감매상 무상분배’를 통한 토지개혁을 외친 소신파였다. 무엇보다 그는 소임을 다한 사법부의 수장으로 오늘날 기억되고 있다. 반민특위 해체를 비판하고, 사사오입 개헌이 불법임을 역설하고, 정권 연장을 위한 보안법 개악에 반대하는 등 그는 이승만 정권의 반민주적 행태에 맞섰다.
사고의 유연함은 그의 소신을 더욱 빛나게 한다. 유학에서 공부를 시작한 그가 일제 치하 어려웠던 시절 “산 사람 먹자고 하는 것”이라며 조상 제사를 그만뒀다는 것은 놀랍다. 신식 교육을 받지 못하고 시집온 큰며느리를 딸과 함께 여학교에 보낸 이다운 행동이다. 남녀 평등주의에 뿌리를 두고 당시로선 파격이던 동성동본의 결혼 허용과 간통죄 불벌을 주장하기도 했다. 김진배 전 의원은 “내 앞에서 술은 마시면서 담배는 못 피우다니 쫌보요”라며, 26살이던 자신에게 맞담배를 권하던 72살 가인을 회고했다.
가인 이후 국민들이 이름을 기억하는 대법원장은 드물다. 사법부가 제구실을 못한 탓이다. 최근 나온 박철언씨의 회고록을 보면, 1981년 대법원장 임명 때 전두환 대통령은 “후보들을 만나 다짐을 받으라”고 비서관에게 지시했다 한다. 실제 대법원장이 된 이가 면접 때 한 말은 “임명권자와 국민을 위해 봉사하겠다. 국가안보는 민주주의나 기본권, 인권의 전제가 되는 것으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박씨 주장의 진위는 나중에 검증돼야 하겠지만, 사실이라면 궁극적으로 국민에 봉사하는 자리임을 망각한 슬픈 ‘충성서약’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곧 새 대법원장 후보를 추천한다. 이번에야말로 뒷날 국민들이 대법원장이라면 바로 떠올릴 그런 인물이길 바란다.
정남구 논설위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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