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주 언론인
반백의 신사가 집 밖 골목을 배회하고 있었다. 수상한 사람 같지 않아서 말을 걸었다. 이민 갔다가 30년 만에 귀국했는데 자신의 집이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했다. ‘얼마 전까지 있었던 한옥이군요. 어느 날 포클레인이 와서 부쉈어요’ 했다. 낙담해서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며 1년만 빨리 오지 하다가 내 살던 집을 잃은 기억이 떠올랐다.
자식들 줄줄이 공부시키느라 형편이 쪼그라든 부모님은 정동의 집을 팔고 당시엔 허허벌판 변두리였던 불광동으로 이사했다. 노년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집을 떠날 때 언젠가 그 집을 사서 부모님을 모신다는 막연한 꿈을 꾸었다. 30년의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단독주택으로 이사하면서 까맣게 잊었던 꿈이 생각났다. 내가 태어났던 집은 터무니없이 비쌌다. 얼마 전에 찾았더니 마당 한뼘 없이 빡빡한 4층 건물로 바뀌었다. 친구들 집이 모여 있던 언덕길은 카페와 가든이 자리잡았다.
개인적으로 추억은 사라졌고 상실감에 몇날 며칠을 서성였다. 문득 70년대에 안동댐이 세워지기 직전 수몰될 지역의 답사를 갔다가 주민들이 구구절절한 사연을 풀어놓았던 일이 기억났다. 내 일과 겹쳐지니 비로소 그들의 사무쳤던 슬픔이 되살아났다. 남의 일로 보이던 것이 나의 일이 되고 우리 모두의 일이 되면 그것이 역사가 되는 것이리라. 일제 때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나 만주로 사할린으로 떠난 사람, 전쟁 때문에 북의 고향산천을 두고 온 사람, 개발의 시대에 새마을운동과 국토개발, 아파트 건설 등으로 정든 땅을 떠난 사람, 최근에는 4대강 사업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적막강산이 되었을까 실감한다.
건축가들은 역사의 현장으로서의 건축물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건축물이 사라지면 역사도 소멸된다고 말한다. 추억하고 기억해야 할 장소의 보전과 발굴 복원은 모든 역사 깊은 나라들의 중요한 이슈다. 외국여행을 가면 우리는 건축물을 통해 그들의 찬란한 문명과 정복과 침략의 역사도 함께 본다. 그런 영욕의 역사를 통해 다른 나라의 국민들을 이해하게 되고 가까이 느끼게 된다.
최근에 독립문을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독립문건축의 주역이었던 독립협회의 면면들이 친일파였기 때문에 독립의 건축물은커녕 친일의 역사물이라는 이유다. 역사란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하나의 사실로서 그대로 자리매김되어야 한다. 을사오적으로 대표되는 몇몇의 행적으로 모든 친일이 슬쩍 묻어가고 대다수의 친일 과거는 아직 청산되지 않았다. 두려운 것은 일제의 잔재를 청산한다면서 친일의 잔재도 청산하고 없었던 일로 유야무야해 버리는 일이다. 개인적으로 경복궁 앞의 총독부 건물이 없어지는 것을 반대했었다. 독립기념관으로 삼아 독립과 친일의 역사를 배우고 전쟁과 독재와 민주주의를, 역사를 기억하고 느끼는 장으로 보전되길 바랐다. 후손들이 현장에서 미래를 만들어 내길 원했다.
서울에서만 평생을 살았기 때문에 서울의 곳곳이 개인적 추억의 자리이자 역사의 현장이었다. 4·19를 지켜보았고 이기붕의 자택에서 꺼내온 물건들을 지금의 경교장 근처에서 불태우는 것도 보았고 트럭에 나누어 탄 대학생들이 만세를 부를 때 가슴이 떨리던 기억도 난다. 5·16 때 광화문 앞의 바리케이드도, 그 앞에 서 있던 쿠데타 주역들도 보았다.
동대문운동장, 예전의 서울운동장은 특히 잊을 수 없는 곳이다. 야구광인 아버지를 따라가 장훈 선수도 보았고 박현식·김응룡도, 무수한 고교야구의 스타들을 그곳에서 만났다. 차범근의 슛도 거기서 처음 보았다. 겨울엔 스케이트도 탔다. 변변한 군중집회 시설이 없었던 시절이라 궐기대회도 자주 열렸고, 미스코리아 대회도 열렸다. 시민들의 여가생활의 메카였다. 디자인센터로 변한 건축물은 외국 유명 건축가의 작품이다.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역설해도 그 센터는 역사도 시간의 연속성도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삶도, 그곳에 울려 퍼지던 기쁨 탄성 즐거움도 역사 자체를 어둠 속으로, 침묵 속으로 소멸시켰다.
시내 한복판에 체육공원이나 종합운동장을 만들어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만드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을까. 서울운동장이 도시개발의 걸림돌이었는지는 두고두고 의문과 안타까움과 분노로 남는다. 현장이 없는 역사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김선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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