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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명수의 사람그물] 꽃을 심는다고 사람을 철거합니까?

등록 2013-04-08 19:11

이명수 심리기획자
이명수 심리기획자
식목일 전날, 중구청이 대한문 앞에 꽃을 심었다. 꽃이 얼마나 고팠으면 새벽에, 그것도 사람 다니는 길에 화단을 급조했을까 싶지만 물론 그 이유는 아니다. 쌍용차 분향소를 기습 철거한 뒤 그 자리에 분향소가 다시 들어서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무지막지한 법집행이다.

꽃밭을 지키려는 중구청의 노력은 가히 필사적이다. 1m 높이의 펜스를 설치하는 것은 기본이고 거의 전직원을 동원해 24시간 철야경비까지 선다. 발 맞춰 인간펜스처럼 늘어선 수백명의 경찰은 꽃밭에 들어갔다고, 꽃을 뽑았다고, 꽃밭이 불법이라 항의했다고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진압한다. 연행된 이들만 50명이 넘고 심지어는 구속영장까지 청구한다.

꽃을 인질로 한 중구청의 게릴라식 법집행은 치졸하고 찌질하다. 총알이 빗발치는 교전 현장에 어린아이를 앞세워 적의 공격을 막아보려는 것처럼 기만적이기까지 하다. 결과적으로 시민들이 법에 대해 가지고 있음직한 공정성과 신뢰성을 훼손하는 행위다. 40t의 흙으로 보도블록 위에 급조한 화단에서 꽃과 묘목이 자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꽃을 심은 사람들도 안다. 그럼에도 집달리가 붙여 놓은 빨간딱지처럼 꽃밭에 손대면 잡아간다. 한 기자의 말처럼 화단에 들어서면 체포하는 세계 최초의 화단 보안법이다.

국가가, 국민과 의견이 다른 지점에서 절대강자인 자기를 지키기 위해 자의적이고 기만적으로 법을 동원하는 이런 작태는 걱정스럽다. 국가공권력 스스로가 법치정신을 희화화하는 일이다. 법이란 게 결국 법 집행자들의 이현령비현령 도구로구나. 눈 가리고 아웅 하면 되는 것이로구나. 그런 식으로 국민들의 마음속에 법을 조롱하고 법에 대한 합리성과 공정성을 의심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박근혜 정부가 중시한다는 법치주의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금지된 곳에서의 상습적 쓰레기 투기로 분란이 끊이지 않는 동네가 있었다. 그 어떤 경고나 설득, 감시카메라도 소용이 없었는데 그 분란을 한 방에 잠재운 것은 꽃밭이었다. 불법 투기 장소에 꽃밭을 만들었더니 아무도 쓰레기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번에 중구청이 참조했을지도 모를 어떤 실험 결과다. 만약 그랬다면 중구청은 꽃밭이 의미하는 근본적 의미를 잘못 짚었다. 사람들이 쓰레기를 버리지 않은 건 단지 그곳이 꽃밭이라서가 아니다. ‘이런 꽃밭을 만들었다면 누군가 많은 정성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그것을 존중해야 마땅하다’는 마음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선의에 대한 존중이라는 말이다. 대한문 앞 화단엔 선의는 없고 무자비와 꼼수만 어른거리는데 무슨 수로 존중하나. 분노와 항의만 유발하는 화단일 수밖에 없다.

그 화단이 어떤 자리인가. 며칠 전까지 쌍용차 희생자 24명의 분향소가 있던 곳이다. 2009년 쌍용차 사태 뒤 한달마다 상복을 입고 있는 해고노동자들이 시민들과 연대하여 마지막 안간힘을 쓰고 있는 벼랑 끝 목숨 같은 곳이다.

대한문 현장에서 한 시민이 들고 있는 ‘꽃을 심는다고 사람을 철거합니까?’란 항의 푯말이 눈을 찌른다. 화단에 꽂아 놓은 영정사진을 철거하는 중구청 직원들의 조끼엔 ‘살고 싶은 안전특별구, 서울의 중심-중구’라는 글씨가 적혀 있다. 무엇이 안전한 것이고 사는 데 어떤 게 중심이어야 하는지 저들은 아는 것일까. 비 오는 오후, 찬 바닥에 앉아 화단을 향해 절규하듯 침묵하고 있는 해고노동자들을 바라보다가 빗물처럼 울었다. 무덤 같은 화단은 철거되어야 한다. 그곳은 사람이 있던 자리다. 모든 것은 본래의 자리로. 그게 법이 존재해야 하는 최소한의 이유다.

이명수 심리기획자, 트위터 @mepr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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