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수 심리기획자
아이가 말했다. “엄마, 반에서 왕따당하는 애가 있어. 걔한테 말 시키면 같이 왕따시켜서 걔는 친구가 하나도 없어. 어쩌면 좋지?” 엄마가 망설이다가 말했다. “걔하고 놀지 마. 그러다 너까지….” 다음날 그 말을 한 아이가 죽었다. 아이는 자신의 얘기를 엄마에게 털어놓은 거였다.
며칠 전, 실화를 조금 가공해서 내가 트위터에 쓴 글이다. 5000회가 넘게 전파됐다. 왜 그토록 많이 퍼진 것일까. 그 글과 관련해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그게 실화인가?’이다. 뻔히 알면서도 외면하고 싶은가 보구나, 하는 느낌이 강하다. 현실로 받아들이기 버거워서 그랬을 것이다.
아동청소년기의 아이가 있는 부모라면, 이 나라의 교육환경이 얼마나 비인간적인지 체감하고 있는 부모라면, 지금 내가 부모로서 아이에게 어떤 존재일까를 고민해본 적이 있는 부모라면 모두에게 지옥도를 강요하는 이 비현실적인 현실 앞에서 가슴을 쓸어내릴 수밖에 없다. 그 지옥도를 조장하는 일에 나도 예외일 수 없다는 현실인식은 심장에 바늘이 후두둑 떨어지는 듯한 고통을 수반한다. 그런 고통을 감당하는 게 쉽지 않으니 외면의 방어기제가 강력하게 작동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아동청소년의 자살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는 너도 알고 나도 안다. 부연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다. 특정 지역에서 1년4개월 사이 중·고교생 13명이 집단따돌림, 학교폭력, 성적부담, 신병비관 등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내 머리가 심장을 갉아먹는데 더 이상 못 버티겠다’고 절규한다. 그런데도 이 사회의 반응은 여름 소나기 피하듯 그때뿐이다. ‘다른 학생들은 그 정도로 죽지 않는다. 그럼, 이런 상황에서 안 죽는 애들은 다 문제가 있는 거야?’ 피해자의 문제로 몰아가는 듯한 끔찍한 진단이 지금도 단골메뉴처럼 등장한다. 아이가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듯 지금의 교육환경은 철저하게 어른들의 잘못과 욕심에서 비롯한 것인데 어찌 그렇게 무책임한가.
중학교 아이 수십명을 무인도에 풀어놓고 살육전을 강요하는 일본 영화의 한 대사는 섬뜩하다. “각자 나눠주는 무기로 한 사람만 살아남을 때까지 싸워라. 기간은 3일. 만약 제한시간까지 두 사람 이상 살아 있으면 목에 채워진 센서가 폭발해 죽는다.”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교육현실이 바로 그렇다. 그런 상황에서 내 아이에게만 더 좋은 무기를 제공하기 위해 아등바등하거나 꼭 끌어안고 최후의 승자이길 기원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이 나라의 교육현실은 전쟁 같은 상황이 아니라 진짜 전쟁터다. 아무리 좋은 방탄복을 입혀봐야 전쟁을 끝내지 못하면 결국엔 다 죽는다. 전쟁을 끝내야 다 산다.
그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결정적 한 방은 어른들이 자신이 어른임을 자각하는 일이다. ‘어른이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 어른이다.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보듬고 사랑하는 일이 어른의 할 일이다. 지금의 우리도 그런 어른성(性)의 도움으로 아이의 시기를 건너왔다. 누구나 그렇다.
어른이라는 사람들이 아이들의 죽음에 이렇게 수수방관해서는 안 된다. 본능이라는 이유로 내 새끼만 살리겠다고 발버둥 쳐봐야 누구도 살리지 못한다. 겨우 살아나도 제대로 된 삶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학업성취도가 세계 최고인 우리나라 아이들의 행복지수가 꼴찌 수준이 된 건 벌써 오래전 일이다.
‘무엇보다 우선해서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하고도 중요한 문제’라는 수식어는 이런 때 사용해야 하는 거다. ‘어른이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아이들을 살릴 수 있다.
이명수 심리기획자, 트위터 @mepr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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