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주 언론인
얼마 전에 야한 영화 한편 본다는 가벼운 기분으로 <셰임> 시사회에 갔다. 청소년 관람 불가이고 섹스중독자인 남자주인공의 이중적 삶을 그렸다는 광고문구를 들여다보며 자리에 앉았다. 충격이었다. 야한 영화이기는커녕 섹스를 이렇게 외롭고 슬프고 황량하게 그린 영화는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우울했다. 마음이 무거웠다. 섹스는 많지만 소통은 없고, 소통을 하고 싶지만 소통이 두려워 욕망에만 매달리는, 서울에도 도쿄에도 파리에도 존재하는 강퍅한 도시생활의 외로움을, 섹스라는 코드를 통해 추적한 일종의 보고서였다.
뉴욕의 30대 여피족인 주인공은 유능하고 멋진 외모를 가졌지만 타인과의 소통을 두려워한다. 대화와 공감을 회피하고 찰나적인 섹스에만 탐닉한다. 조금이라도 깊은 관계가 될 것 같으면 섹스도 거부한다. 그런 자신을 혐오하고 파괴하고 싶어한다. 주인공의 여동생은 섹스를 통해 소통을 하고 싶어하고 사랑을 나누고 싶어하지만 그것 또한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섹스는 넘치는데 사랑은 없고 모두 불행하다.
영화를 보고 나와 남자 둘과 여자 둘이 마주앉아 심각하게 사랑에 대해, 섹스에 대해, 사랑 없는 섹스에 대해, 인간의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영화에 대한 공감과 소통 부재의 시대에 대해 동의하면서도 막상 성과 관련된 진지한 이야기를 진전시킬 수는 없었다. 그런 이야기를 솔직담백하게 할 수 있는 준비도 연습도 안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 70의 친구 부부가 얼마 전 비아그라를 먹으며 부부생활을 즐긴다고 고백했다. 아주 드문 일이라 신선했다. 젊었을 때는 한번 하고 싶어 번민하고 몸부림했으나 나이 들어 욕망이 시들해지긴 했어도 부부간의 소통을 위해 무언가를 함께 고민하고 나눈다는 은밀한 기쁨 때문에 정기적으로 약의 힘을 빌린다고 했다. 90년대에 미국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밥 돌 상원의원 부부가 광고에 나와 비아그라를 선전하며 자신들의 여생이 행복해졌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텔레비전에서 보았다. 이리저리 전화를 돌렸다. 너희는 약 먹느냐, 필요성을 느끼지 않느냐 하고 물어보았지만 모두 꽁무니를 뺐다. 약이 필요 없다는 건지, 섹스가 필요 없다는 건지 불분명하지만 여하튼 별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아는 의사에게 물었다. 약 쓰는 거 당연합니다라고 했다. 섹스에 대한 욕망은 나이 불문이며, 능력이 안 되면 눈이 나쁠 때 안경을 쓰듯이 귀가 나쁘면 보청기를 끼는 것처럼 간이나 심장이 나쁘면 처방을 받는 것처럼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나이 든 부부가 나란히 찾아와 상담을 하고 처방을 받아가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라고 한다. 모든 약이 남용하면 나쁜 것처럼 과용만 안 하면 된다고 했다.
우리는 성에 대해 나이 불문하고 호기심을 갖고 살지만 실제로는 성과 관련된 문제는 아무도 없는 것 같은 일상을 산다. 그러나 한겹 들여다보면 세상은 온통 섹시코드의 범람이다. 대중문화는 싸이의 노래부터 어린 아이돌들의 움직임까지 섹시코드가 주역이다. 그러나 정작 성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섹시코드 정도로 대리만족을 취하고 넘어가 버린다. 성적 갈등과 욕망이 사회문제가 되고 범죄가 되고 청소년 문제로 번질 때만 근엄하게 대책을 이야기한다. 대책을 내놓는 사람들조차 솔직하고 구체적인 답변을 하지 못한다.
부부간에, 애인 사이에, 친구 사이에, 부모자식 사이에도 그것은 홀로 알아서 처리할 문제일 뿐 아무에게 물어보지 못한다.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건강한 방법인지 알 길이 없다. 그런 가운데 온갖 개인적 욕망의 비뚤어진 처리 방법이 숱하게 쌓여서 범죄로 사회문제로 가는데도 말이다. 인생에서 많은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들, 돈·명예·성공, 소위 행복하다는 것들을 채우고 나서도 인간의 내밀한 성 문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 사랑 부재의 시대, 그나마 가진 것을 잃을까 봐 혼자 살기를 선택하고 서로에게 부담이 되기도 책임지기도 회피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지는 것이 영화 <셰임>과 별다르지 않은 지금의 우리 사회다. 성적 욕망에 대해, 사랑에 대해, 인생에서 그것의 중요성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하는 자리가 모두에게 필요하다.
김선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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