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섭 오피니언부장
북악산 자락에 자리잡은 창덕궁은 조선왕조 500년의 영광과 오욕을 품은 곳이다. 1404년 태종이 정궁을 놔두고 창덕궁을 지은 것은 왕권을 놓고 형제간에 골육상쟁하던 기억을 떨쳐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경복궁에는 ‘왕자의 난’의 피비린내가 배어 있었다. 후대 왕들이 창덕궁을 더 사랑해 침식과 정무 공간으로 삼은 것이 피의 기억 탓만은 아니다. 경복궁이 넓고 평평한 땅에 대칭으로 서 있어 위세는 드높지만 정감이 부족한 데 반해, 창덕궁은 주위의 산세와 지형을 그대로 살려 전각들을 맵시 있게 배치함으로써 자연미를 드러내고 인간미를 간직한다. 왕들에게 창덕궁은 친근하고 다감한 궁궐이었다. 이 인간적인 궁궐은 훗날 대한제국의 최후를 목격하기도 했다. 1910년 대조전 흥복헌의 마지막 어전회의에서 한일병합이 결정됐다.
창덕궁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데는 궁궐 뒤편에 넓게 펼쳐진 후원의 아름다움이 한몫을 했다. 일반 백성은 드나들 수 없다 해서 금원으로 불리기도 하고 안쪽 깊숙이 감추어져 있다고 해서 비원으로 통하기도 한 곳이 창덕궁 후원이다. 나무와 계곡이 어우러진 이 무성한 숲은 왕실의 휴식처이자 산책로였다. 숲길을 꺾을 때마다 아름드리나무들 사이로 정자와 누각이 넓은 연못과 함께 나타난다. 이 후원 한가운데 연경당이라는 건물이 있다. 궁궐 안에 있는 건축물로는 유일하게 민간의 사대부 집 양식을 따랐다. 연경당은 민가 양식이라고는 하지만 120칸의 큰 규모에 행랑채·사랑채·안채·서재·정자를 두루 갖춘 격조 있는 건물이다.
조선 후기 순조 때 지은 이 가옥은 유교 이념이 서린 독특한 구조 때문에 주목을 받는다. 연경당 앞에 이르면 가장 먼저 사람을 맞는 것이 좌우에 긴 행랑채를 거느린 솟을대문 장락문이다. 장락문을 지나면 다시 두 개의 출입문이 눈에 들어오는데, 오른쪽이 장양문, 왼쪽이 수인문이다. 장양문으로 들어서면 바깥주인의 거처인 사랑채가 나오고, 수인문으로 들어가면 안방마님의 공간인 안채가 나온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과 사랑채로 들어가는 문을 따로 만든 것이다. 게다가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담장을 세워 마당을 둘로 나누었다. 부부유별의 성리학 세계관이 건축물에 그대로 투영돼 안채와 사랑채를 엄격하게 분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안채를 돌아 집의 측면에 서면 앞에서 볼 때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하얀 창호지를 바른 넓은 문이 방과 방 사이에 벽 대신 서 있는데, 이 문들이 활짝 열려 안방에서부터 대청과 건넌방까지 모두 하나로 통하게 돼 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건넌방 너머로 사랑방이 붙어 있다는 사실이다. 앞에서는 출입문도 따로 두고 마당 가운데에 담장까지 쳐 둘로 나눈 집인데, 측면에서 보면 안채와 사랑채가 붙어 있는데다, 안방에서부터 사랑방까지 일자로 뚫려 있는 것이다. 안방에 앉은 부인이 눈짓만으로도 사랑방에 마음을 전할 수 있다. 밖으로 막힌 듯한데 안으로 통해 있는 것이다. 이 내통이야말로 부부유별의 엄격한 성리학 세계가 지속되고 번성할 수 있는 비밀이었다. 만약 안방과 사랑방 사이가 진짜 벽으로 막힌다면 부부는 한집안에 살면서도 영영 남이나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되고 만다.
개성공단 안 마지막 남쪽 체류자까지 철수한 상황을 보며 생각이 연경당에 가닿는다. 안방과 사랑방 사이가 벽으로 막혀 간다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돌이켜보면 서해교전 때도 반대쪽 금강산 뱃길은 열려 있었고, 연평도 포격 때도 개성으로 가는 문은 닫히지 않았다. 앞이 막히더라도 뒤로는 뚫려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질식하지 않는다. 남북 폐색의 위기 앞에서 내통의 지혜가 절실하다.
고명섭 오피니언부장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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