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유학도 갔었으니 가수 미셸 폴나레프의 노래 하나쯤 알고 있겠죠? 특히 1971년 프랑스의 한 재개발 지역에서 자신의 정원을 지키기 위해 맞서다 돌아가신 뤼시앵 모리스 할머니를 애도하며 미셸이 작사·작곡한 노래는! 제목은 다소 섬뜩합니다. ‘누가 할머니를 죽였나요?’ 하지만 당시 공·민영방송이 앞다퉈 이 노래를 국민들에게 소개한 결과 미셸은 일약 국민가수로 부상했습니다. 그만큼 작품성은 물론 그 의미 또한 남달랐습니다. 그런 노래를 국민가요로 받아들인 프랑스는, 님이 말하는 ‘문화 융성’의 자부심을 가질 만도 합니다.
폴나레프가 이 노래를 세상에 알린 1971년 여름, 지구 반대편 한반도 남쪽의 수도 서울 인근에서도 대규모 소요사태가 일어났습니다. 도심 재개발과 주민 강제이주에서 비롯된 사건이었습니다. 광주 대단지 사건! 의도된 농촌경제의 파탄으로 무작정 서울로 밀려온 농민들과 그 자식들은 청계천, 용산, 영등포 등에 거적때기를 얽어 만든 판자촌을 형성합니다. 하루하루 먹고살기 힘든 그들은 당연히 교통 좋고 일거리 찾기 쉬운 도심으로 밀려온 결과였습니다. 근대화를 구호 삼아 빈약한 정통성을 채우려던 정권의 눈에 그것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참담한 현실이었습니다. 근대화는커녕 온통 빈민굴로만 비칠 터이니 하루빨리 지워야 할 대상이기도 하구요.
그래서 판자촌을 헐어버립니다. 1968년부터 주민들을 경기도 광주로 반강제 이주시켰죠. 허허벌판에 성남출장소를 짓고, 그곳이 신천지인 양 온갖 감언이설로 주민들을 꾀었습니다. 상수도, 전기, 전화 다 놔준다, 일거리 책임지겠다 등등…. 꼬임에 넘어가지 않은 이들도 많았지만 그들 역시 정부가 강제로 내쫓는 데는 배겨낼 수 없었죠. 그러나 가서 보니 성남엔 공장 하나 없고, 일용 잡부 자리 하나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상하수도·교통·통신시설도 전무했습니다. 그런 곳으로 정부는 1971년 8월까지 22만여명을 이주시켰습니다. 설상가상, 토지대금을 약속(평당 200원)보다 40~80배 높은 값으로 일시에 지급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마실 물조차 구하기 힘든 사람들에게 정부가 사기에 갈취까지 한 것입니다.
주민들로선 죽기살기로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말이야 민주사회라지만, 그들은 나라의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권력의 종이고, 자본의 노예였습니다. 권력과 자본은 그나마 남아 있던 입주 딱지까지 다 털어갔습니다. 첫날 3만여명이 모였던 것이 이튿날 5만여명, 그리고 그다음날엔 무려 10만여명이 분규에 가담했습니다. 성남출장소는 불에 탔고, 공무원과 경찰은 모두 도망쳤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수탈과 억압의 강도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사회는 뒤집힙니다.
서울 사람들은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잘 몰랐죠. 방송은 물론 신문도 정부의 보도통제에 제대로 보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프랑스에서처럼 자기 땅에서 쫓겨난 이들을 위한 노래 한 곡 있을 리 만무였습니다. 당시 ‘누가 할머니를 죽였나요’는 이미 세계적으로 개발독재에 저항하는 상징적 노래가 되어 있었습니다만, 한국에는 알려지지도 않았죠. 개인적인 상상이지만, 이 노래가 그때 불렸다면, 그리하여 쫓겨나는 자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공감하게 됐다면, 광주 대단지 사건 이후 계속됐던 서울과 수도권에서의 재개발과 강제이주의 폭력성은 훨씬 줄어들었을 겁니다.
할머니가 살았던 시절에
정원에는 꽃들이 만발했었지
세월은 흐르고 추억만 남았네
너의 손엔 더이상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지
누가 할머니를 죽였나요
세월인가, 아니면 무심한 사람들인가요?
라라라~
할머니가 살았던 시절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나무 위에 가지들이, 가지 위에 나뭇잎들이
나뭇잎 위에 새들이 노래했었지
누가 할머니를 죽였나요
세월인가, 아니면 무심한 사람들인가요?
라라라~
불도저가 할머니를 죽이고
꽃밭을 짓밟았지
새가 노래할 곳은 이제 없어.
이게 당신 마음에 들기 위한 건가?
누가 할머니를 죽였나요?
세월인가, 아니면 무심한 사람들인가요?
라라라~
이것이 대중들 사이에서 불리기 시작한 것은 10·26 사건이 일어난 뒤였죠. 공교롭게도 똑같은 이름의 전라남도 광주에서 시민들이 학살당한 뒤였죠. 경기도 광주에서 마지막 피난처마저 잃어버린 이들이 들고일어났듯이, 전남 광주에선 막 되살아나는 민주주의 꽃을 지키기 위해 시민들이 봉기했다가 정부군에게 학살당했습니다. 그 사건을 겪은 뒤 노래의 가사는 이렇게 바뀐 채 불렸습니다. 제목은 ‘오월의 노래’로 순화됐지만, 내용은 그야말로 피투성이입니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어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사진을 한 아이가 지켜보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그때 가해자들, 그들에게 속아 외면했던 사람들은 노래가 어찌 그리도 살벌하냐고 핀잔을 주곤 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가족, 친척, 친구 혹은 이웃 수백명이 학살당하고, 수천명이 부상을 입거나 실종됐다면 그런 말이 나올 수 있을까요. 노랫말은 그저 그때 그 사실을 옮긴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희생자들은 이 노래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비극적 상처를 더는 돌아보기 힘들었고, 정치적 선동에 이용한다는 힐난을 듣기 싫어서였죠. 사실 비극을 저질렀으면서 그것을 악용해 희생당한 시민을 더 고립시킨 것은 바로 그들이었는데도 말입니다. 대신 희생자들은 그들의 노래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선택했습니다. 수도 없이 자기검열 한 끝에 내놓은 것이었습니다. 앞선 임의 뜻을 따라 ‘국민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다짐의 노래였습니다. 헌법과 법과 교과서가 명시한 내용입니다. 그걸 두고 5월 한달, 정체가 애매한 이 정부와 약자를 괴롭히면서 희열을 느끼는 도착증 환자들이 난리를 죽였으니 ‘민주’의 길은 멀고도 험하기만 합니다.
우리의 5월은 기구합니다. 헌정사의 비극이 바로 그 계절에 점철돼 있었고, 그때마다 주인 된 시민은 통곡하고 우리의 민주주의는 피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4·19 민주혁명을 전복시킨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것도 5월이었고, 19년 지속돼온 총통체제의 자멸과 함께 찾아온 민주화의 봄을 전복시킨 5·17 군사정변도 그때 일어났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시민의 저항을 피로써 진압한 것도 그때였습니다. 그 통곡과 눈물을 보고 들어야 합니다. 근대로의 전환의 바탕이, 시민이 주인 되는 사회, 곧 민주주의라고 할 때 우리는 여전히 봉건제와 독재의 위협 속에서 다리 난간 위를 걷고 있는 형국입니다.
님께서도 선서했다시피, 대통령의 책무는 시민을 주인으로 모시는 일입니다. 그들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고, 그들의 천부인권을 보호하며, 그들의 행복 추구를 지원해야 합니다. 시민이 돈이나 권력의 종이 되는 봉건 혹은 전체주의 사회로 전락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5월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6월 호국의 달로 넘어가는 길목입니다.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민주’의 뜻을 새기십시오. 시민이 이 나라의 주인이 될 때 시민 모두가 자발적으로 이 나라를 위해 헌신합니다. 그래야 국가는 반석에 올라섭니다. 노예적 굴종을 강제하는 사회에서 시민들은 헌신은커녕, 저항세력으로 돌아섭니다. 국운 융성을 기대할 수 없죠. 이제 ‘민주’의 의지를 다잡기 바랍니다. 그래야 아비의 빚도 청산하고, 아비의 오명도 씻어버릴 겁니다. 단임 대통령으로 눈치 볼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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