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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 에서] 100년의 봉인 / 김영희

등록 2013-05-29 18:58수정 2013-05-29 21:03

김영희 문화부장
김영희 문화부장
1980~90년대, 서울 이태원로를 끼고 용산 미군기지의 메인포스트로 들어가는 게이트1 앞을 지나다 보면 자주 전경과 미군 헌병으로 가득했다. 반미시위가 잇따르던 시절, 이 입구는 운동권들에겐 ‘꼭 한번 뚫어봐야겠다’던 곳이었다. 물론 한번도 그곳이 제대로 뚫린 적은 없다. 시위자들에게 뚫리기는커녕, 일반인들에게 제대로 공개된 적도 없다.

일제가 만든 근대건축물 130동 이상이 용산기지 안에 남아 있다는 사실과 그 현장을 처음 보도한 기사(<한겨레> 17일치 1면, 10~14면)를 보며 미묘한 흥분까지 느낀 건 그런 기억 때문일지 모르겠다.

지난해 방문한 일본의 미군 요코스카 기지가 문득 겹쳐졌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 내부보다 더 인상적인 건 전혀 예상치 못한 ‘과거’를 품고 있는 기지 그 자체였다. 70만평 규모의 그곳에선 2차대전 막바지 일본 해군 소속 항공모함 ‘시나노’(信濃)가 건조됐던 항모 전용 제6도크를 비롯해 100년이 넘은 도크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에도막부 말기인 1871년 지어진 조선소를 1903년 일본 해군이 해군공장으로 이용하며 해군항해포술학교, 해병단, 해군군법회의소 등이 차례차례 들어섰던 곳이다.

사령부 건물의 1층엔 역대 일본인 교장들의 초상사진과 기록 등이 전시되고 있다. 한 장교식당 앞에는 전쟁 시절 군인들이 일왕과 자신의 고향을 향해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도록 일왕 및 각 현의 방위를 표시해놓은 자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1년에 몇차례 마련되는 ‘일-미 친선 기지 역사 투어’ 행사 때는 일본 국적 시민들의 신청을 받아 기지 내 일본군의 유적과 미군 시설들을 둘러보게 한다. 요코스카 기지에선 끊임없이 전범국 일본의 이미지가 지워지고 친근한 양국관계의 이미지가 재생산된다.

도쿄에서 남쪽으로 69㎞ 떨어진 요코스카 기지를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용산기지의 경우에 그대로 대입할 순 없을 것이다. 한반도가 휴전상태라는 특수성 탓도 있다. 그럼에도 미국의 안보동맹국인 두 나라 도시에 자리잡은 기지의 차이는 용산의 폐쇄성을 더 도드라지게 각인시켰다.

20세기 초 러일전쟁을 계기로 본격적인 군사기지를 건설한 이래 용산은 일본군의 거점지에서 침략 전진기지로 변화해갔다. 그리고 1945년 이후 주한미군사령부, 한미연합사령부가 차례로 들어서며 냉전 이데올로기의 상징적 공간이 됐던 철저하게 ‘타인의 공간’이다. 과천 행정도시와 도심을 최단거리로 연결하려는 동작대교 기획이나 지하철 4호선의 노선을 원래 계획과 다른 기이한 형태로 만든 것도 용산기지의 배타성이었다. 10여년 전부터 문제가 된 녹사평역 근처 환경오염에 대한 원인을 밝히려 해도 서울시와 환경부는 미군의 협조를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는 처지다.

다행히 용산은 2016년이면 우리에게 반환되어 73만평의 공원으로 변모하기 시작할 예정이다. 고밀도 도심에 자리잡은 거대한 ‘빈 공간’을 갖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행운이라고 한다. 서울이, 대한민국이 압축적 개발을 거듭하는 동안 용산은 100여년간 시간이 멈춰진 공간으로 남아 있다.

지난해 결정된 공원 설계 당선작을 구체화하는 논의는 이제부터 서둘러야 할 지난한 과정이다. 고려시대 땐 남경의 후보지로 거론되고 조선시대 도성과 한강을 연결하는 물자의 집결지였던 반면, 고려 말에는 몽골군의 병참기지, 임진왜란 때는 왜군의 보급기지, 임오군란 후에는 청군이 주둔했고 이후 일본군의 본거지가 됐던 이 땅. 이 역설적 공간에 우리는 어떤 기억을 새길 것인가. 역사적 상처는 덮는다고 사라지지도 치유되지도 않는다.

김영희 문화부장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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