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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바른 원칙을 기대합니다

등록 2013-06-17 13:52수정 2013-06-17 14:01

곽병찬 대기자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⑪
참으로 어수선합니다. 웬만한 경륜이 아니고서야 도대체 헷갈려서 길을 잃고 말 것 같습니다.

대통령선거 당시의 국정원장과 서울경찰청장이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최고 권력기구가 대통령선거에 개입해 국민의 선택을 왜곡했다는 겁니다. 크건 작건 그 일로 혜택을 본 건 대통령님이니 모른 척할 순 없을 겁니다. 지금 청와대는 묵언수행중인 수도승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지만, 무언가 국민을 납득시킬 것들을 생각하고 궁리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국가정보원의 대선·정치 개입 의혹’과 관련해 피고발인 신분으로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은 뒤 4월30일 새벽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을 나서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국가정보원의 대선·정치 개입 의혹’과 관련해 피고발인 신분으로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은 뒤 4월30일 새벽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을 나서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일부에선 선거 무효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국정원의 선거 개입과 서울경찰청의 수사 조작만으로 대통령의 하야를 주장하기는 힘들 겁니다. 새누리당 선대위가 수사 축소, 은폐, 거짓 발표에 간여했다면 모르겠지만, 님과의 관련성이 명확하지 않은 이상 그런 요구를 대놓고 하기는 힘들 겁니다. 일단 국민들의 동의를 받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로 말미암은 혼란과 갈등, 충돌을 원하는 국민은 아직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일반론일 뿐, 님은 좀더 엄격한 입장에 서야 합니다. 정치적이고 도의적인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합니다. 그런 모습을 국민은 보고 싶을 겁니다. 대통령선거 운동 마지막 토론회 때, 님은 국정원 직원의 불법행위 문제를 따지는 문재인 후보에게, 오히려 국정원 요원에 대한 인권유린을 규탄했습니다. 그 요원이 불법행위를 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면 문 후보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추궁했고, 문 후보도 이에 동의했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불법행위가 드러났을 경우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님의 추궁은 본인에게 그대로 적용돼야 합니다. 국정원의 불법행위를 오히려 국정원 요원에 대한 인권유린으로 비난하며 이를 선거에 이용한 셈이었으니까요.

굳이 책임의 내용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국정원장과 그 요원들이 선거에 개입해 국민의 선택을 왜곡했고, 서울경찰청장은 수사를 축소조작하고 거짓 발표를 강행했으며, 새누리당 후보와 선대위는 경찰청 발표를 핑계삼아 국정원 요원에 대한 인권유린으로 왜곡해 선거에 이용한 것이 이번 사건의 뼈대입니다. 아무리 요령부득한 사람이라도 무엇을 해야 할지는 쉽게 알 수 있을 겁니다.

이제는 진부한 실례가 되었지만,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닉슨 대통령을 하야에 이르게 한 것은 상대 진영을 도청한 것이 아니라, 이를 은폐하는 과정에서 동원된 거짓말과 불법행위였습니다. 그 부도덕성이 닉슨에게서 민심을 떨어져나가게 했습니다. 이번 사건이 그럴 일도 아니겠지만, 그런 불행한 전철의 한 발자국이라도 밟아서는 안 됩니다. 특히 서울경찰청장의 배후에 대한 의심은 무언가 좀더 선명한 규명이 필요합니다. 차기 경찰청장을 내다보는 사람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렇게 무모하게 증거를 인멸하고 수사를 뒤집어 왜곡하고, 엉터리 수사결과를 마구 발표하는 짓을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느냐는 의심은 지극히 합리적입니다. 그런 그가 검찰의 수사가 진행중인데도 지난달 대구에서 출판기념회를 했는데, 지역에서 한자리하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새누리당은 님의 눈치를 보며 이미 합의했던 국정조사 약속을 뒤집고 있습니다. 님이 그걸 풀지 않으면 국민은 님이 막고 있다고 볼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특별검사도 임명해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평소처럼 곤란한 일만 나오면 묵언으로 회피하는 태도를 이번에도 반복해선 안 됩니다.

사실 지난 한 주, 님의 참모들은 모처럼 어깨에 힘을 주었습니다. 북쪽이 자존심을 죽여가며 장관급 회담을 제의했지만, 박근혜 정부는 확고한 원칙 아래 북쪽의 허풍에 한 방 더 먹였다며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 결과 남북회담은 무산됐지만, 정부의 이런 원칙에 많은 국민이 지지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불과 일주일도 되지 않아 힘자랑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어가고 있습니다. 사실 정부는 원칙과 목표를 혼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정부가 추구하는 남북대화의 목적이 계급장 맞추기 따위의 원칙을 위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수레가 말을 끄는 것이겠지요. 그러면 신뢰? 그러나 그것도 목적일 순 없습니다. 신뢰는 더 큰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배가 될 순 있을 겁니다. 목적과 수단을 혼동해선 안 됩니다. 설사 신뢰가 목적이라 해도, 신뢰는 계급장에서 나오는 건 아닙니다. 최고지도자의 위임에서 나옵니다.

님은 원칙을 강조하는데, 대통령이 지키고 보호해야 할 가장 큰 원칙은 국민의 안녕과 행복입니다. 거기에 맞는다면 약자에게 엎드릴 줄도 알아야 하고, 강자 앞에서 오연하게 버틸 줄도 알아야 합니다. 계급장을 따져, 소중한 밥상을 걷어차 몇몇 사람의 자존심은 지켰겠지만, 국민의 안녕과 행복이라는 원칙은 던져버린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예상했겠지만, 북한이 미국에 고위급 회담을 제의했습니다. 어조가 눈에 띕니다. 수령님과 장군님의 유훈이라고 직접 언급하면서 비핵화 문제를 포함한 양쪽의 관심사를 폭넓게 논의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김일성 수령과 김정일 장군의 유훈이라면 북한에선 헌법 이상의 정언명령이니, 그 진실성은 상당한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물론 미국 쪽이 대뜸 수용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바로 내칠 처지도 아닙니다. 북핵의 직접 당사자는 바로 미국입니다. 북한은 중국, 일본, 미국으로 대화의 폭을 넓혀가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대화를 제의했습니다. ‘김정은호’가 나아갈 방향이 나름대로 세워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이상한 원칙을 앞세워 발을 뺐습니다. 의전(형식) 때문에 평화(내용)의 문제를 버린 셈입니다. 외톨이가 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굳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바른 원칙을 바로 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군자표변이라고 했습니다. 국민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선 여러가지 얼굴과 여러가지 손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국정원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는 그런 빗나간 국정원이나 경찰청으로 말미암아 국민이 혼란과 고통을 겪어선 안 됩니다. 바른 원칙을 기대합니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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