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문화부장
소문만 듣던 ‘그 섬’에 가는 길은 생각만큼 멀진 않았다. 인천연안여객터미널에서 페리로 1시간여, 홀수일인 덕에 덕적도에서 갈아탄 배로 다시 1시간 만에 닿은 굴업도. 그을린 얼굴에 희끗한 긴 머리를 질끈 묶은 서인수 전 이장이 트럭을 몰고 나와 우리를 맞는다. 10가구도 채 안 되는 섬이지만, 깨끗한 시설의 벽돌집에서 섬 토박이 아내 최인숙씨의 맛깔난 제철 음식을 맛보니 그의 민박이 최고 인기라는 이유를 알 만하다.
지난주 ‘굴업도를 사랑하는 문화예술인 모임’은 2박3일간 굴업도에서 공연을 펼쳤다. 아침 해무 가득한 개머리초지 위에서, 고요한 덕물산 좀팽나무 언덕에서, 긴 코로 휘감을 듯 우뚝 선 해안가 코끼리 바위 앞에서 맨발의 춤이 시작됐다. 조명도, 첨단 음향시설도 없지만 음악과 새와 바람소리와 어우러진 무용수들의 몸짓은 그 어떤 무대에서도 경험 못할 특별한 순간을 빚어냈다.
굴업도는 수천만년 전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섬이라고 한다. 고려 유신들이 스스로를 유배시켜 갈매기와 백로조차 울고 가던 구로읍도라 불렸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이팝나무 군락, 왕은점표범나비 같은 희귀한 동식물과 함께 발길 닿는 곳곳 사슴과 뱀과 달랑게를 만난다. 신석기 패총부터 1923년 태풍이 1000명 이상을 집어삼키기 전까지 민어잡이 파시로 번성했던 마을의 흔적도 흥미롭다. 남매의 사랑 전설을 간직한 선단여 바위나 거북이와 토끼 바위는 어떤가. 굴업도는 ‘스토리텔링’이 가득한, 문화적 상상력이 넘치는 섬이다.
이런 굴업도에 씨제이그룹의 계열사 씨앤아이레저산업은 2006년 98.5%의 땅을 사들여 골프장과 대형 관광레저단지를 짓는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씨앤아이레저는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로 그제 검찰에 소환된 이재현 회장과 그의 자녀가 100% 지분을 소유한 ‘패밀리’ 회사다. 시민단체의 반대와 다양한 대안 제안, 인천시의 심의 보류에도 골프장만큼은 철회하지 않고 있다.(최근엔 이 땅 매입 과정에 씨제이 비자금이 투입됐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서씨 부부는 이 싸움의 구심점 같은 인물들이다. 이들은 최씨 부모의 예전 땅을 매입했던 주인의 허락을 받아 18년 전 집을 짓고 8년 전 정착했다고 한다. 씨제이나 현 이장 같은 개발 찬성파들에겐 섬을 떠나지 않는 그들이 무척 껄끄러웠을 것이다. 환경단체나 예술인들의 숙박을 ‘받지 말라’는 얘기를 심심찮게 들었다고 서씨는 말한다. 그는 이 집을 ‘해결’하면 잔금을 주겠다는 씨제이에 땅을 넘긴 주인이 건 재판에 져, 곧 집이 헐리고 철거비까지 물 처지다. 아내의 고향에서 조용히 노후를 보내려던 ‘이장님’은 이렇게 재벌 ‘회장님’과 맞서게 됐다.
내내 궁금했다. 이재현 회장은 굴업도를 밟아봤을까? 헬기로 휙 도는 게 아니라 허리를 굽혀 모래밭 갯메꽃이나 산속 천남성을 만져봤을까. 그랬다면 소독제로 벌 나비 하나 날아들기 힘든 골프장 같은 발상을 했을 리 없다고 믿고 싶다. 환경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전문가들은 복잡한 지형의 이곳에서 수십미터 산을 깎아 골프장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무리고 사업성도 없다고 지적한다. 혼자 즐길 프라이빗 골프장을 지을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굴업도 공연은 소수를 위한 골프장 대신 모든 이들이 즐기며 생태계가 보존되는 문화예술섬으로 이 섬을 바꾸자는 ‘문화적’ 호소인 셈이다.
그러니 이 회장님, 8월 이 섬에서 열릴 음악제에 꼭 가보시라. 그때쯤엔 본인이 못 갈 처지일 수 있으니 개발회사 지분을 가진 자녀라도 보내시라. 그런 다음, 기어이 골프장을 지어야 하겠는지 서씨 부부에게 말해주시라.
김영희 문화부장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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