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섭 오피니언부장
플라톤의 <국가>를 연극에 비유하면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삼은 10막(10권)짜리 장대한 대화극이라고 할 수 있다. 극이 흥미로워지려면 주인공과 대결하는 적수가 강력해야 하는데, 제1권에 등장하는 트라시마코스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쉰살의 소크라테스 앞에서 서른한살의 소피스트가 주인공을 압도할 정도로 막강한 입심과 논리를 자랑한다.
폴레마르코스 집에 초대받은 소크라테스는 묻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성격대로 집주인과 ‘정의란 무엇인가’를 놓고 슬슬 문답을 주고받는다. 다소 단조롭게 이어지던 대화는 트라시마코스가 두 사람 사이에 “야수처럼” 뛰어들면서 아연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이 기세등등한 소피스트는 정의에 대한 통념을 뒤집어 단언한다. “정의란 강자의 이익 말고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통치자는 자기한테 유익한 것을 법으로 제정해 놓고는 그 법을 지키는 것이 정의라고 선포한다. 통치받는 사람들이 법을 어기면 가차없이 처벌한다. 그러니 정의란 결국엔 강자, 곧 통치자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다. 정의야말로 불의다.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에 소크라테스는 반문한다. 의사는 환자의 병을 치료하고, 선장은 승객의 안전을 돌본다. 마찬가지로 통치자는 통치받는 시민들을 이롭게 하는 사람 아닌가. 소크라테스의 “순진함”을 비웃으며 트라시마코스는 일갈한다. “소크라테스 선생, 당신은 정말 양 치는 사람이 양떼를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양떼가 수단이듯이, 통치받는 사람도 통치자의 수단일 뿐이라는 말이다.
트라시마코스가 보기에 강자란 보통사람은 꿈도 꿀 수 없는 거대한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이기도 하다. 사기꾼·절도범처럼 작은 불의를 저지른 자들은 범죄자로 지탄받고 처벌받는다. 그러나 누군가가 아주 큰 불의를 저지른다면, 그리하여 아예 나라를 통째로 훔친다면, 그는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이게 바로 정의의 실상이다. 트라시마코스의 논변을 무너뜨리기는 쉽지 않다. 기고만장해진 트라시마코스는 확언한다. 만약 강자가 불의를 완벽하게 실행할 수 있다면 그는 최고의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상대의 약점을 찾던 소크라테스는 이 대목을 놓치지 않고 창을 밀어넣는다. 불의만 가지고는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한다. 깡패나 도둑의 무리를 보라. 악을 도모하는 자들도 나름의 의리와 신의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이 논리적 추궁으로 소크라테스는 겨우 적수를 주저앉힌다. 주목할 건 소크라테스가 트라시마코스의 입을 막는 데 동원한 논리가 현실에서 불의가 행해지는 참모습을 불현듯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100% 순수한 거짓말보다 진실이 조금 섞인 거짓말이 더 큰 효과를 내듯이, 불의가 최고의 결과를 내려면 ‘의로움’이 섞여야 한다. 불의로 얻은 장물도 그들끼리 ‘의롭게’ 나눠야 뒤탈이 없는 것이다.
‘국가정보원 대선여론공작’ 진실규명 활동이 국정원과 여권의 조직적 훼방으로 파행을 거듭하더니 본질이 파묻혀 실종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정보기관이 개입해 국민주권을 훼손하고 선거과정을 뒤틀어놓은 국기문란이 사태의 핵심이다. 이토록 중대한 민주주의 유린 행위를 단죄하지 않고 넘어간다면, 그것이야말로 불의를 정의로 만드는 일이다. 프로이센 군주제와 타협한 후년의 헤겔은 <법철학> 제3장에서 이런 말을 했다. “위대한 일을 이루려면 여론을 경멸할 줄 알아야 한다.” 통치자는 여론 저 위에 머물러야 한다는 얘기다. 국정원 선거개입의 직접적 수혜자인 이 나라의 대통령이 자신은 마치 아무 일도 모르는 양 짐짓 시치미를 떼고서 헤겔의 그 불순한 명제를 실천하고 있다. 트라시마코스라면 이 무책임에서 ‘강자의 정의’를 볼 것이다. 그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고명섭 오피니언부장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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