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천국>이나 <빌리 엘리어트> 등 유년의 꿈을 그린 영화를 좋아하신다고 했죠. 그렇다면 루이스 캐럴의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물론 원작을 애니메이션 등으로 만든 디즈니 영화들을 잘 아실 겁니다. 소심한 소녀 앨리스가 용기를 내어 이상하고 신기한 나라를 여행하며 겪는 각종 모험과 경험을 그린 것은 그야말로 흥미진진합니다. 압도하는 꿈과 상상력이 어른들에겐 부담스럽겠지만, 그런 현실의 제약에 매일 아이들은 없죠. 그러나 팀 버튼 감독의 2010년 작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예외일 겁니다. 분위기가 좀 어두컴컴합니다.
원더랜드(wonderland)를 꿈꾸던 소녀 앨리스는 어느덧 19살 처녀로 성장했습니다. 그사이 아버지는 불운하게 돌아가시고, 앨리스는 원치 않는 결혼을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현실에서 뛰쳐나가고 싶을 겁니다. 어느 날 강요된 파티의 강요된 상황에서 빠져나온 앨리스에게, 아니나 다를까, 조끼를 입고 회중시계를 찬 하얀 토끼가 나타났습니다. 앨리스는 그 뒤를 따라 굴 깊숙이 쫓아가 이상한 나라로 들어갑니다. 여기까지는 전작과 대동소이한데, 이번에 들어간 나라는 어렸을 때 들어갔던 그 신기한 세상과 전혀 달랐습니다. 괴팍한 성격의 붉은 여왕의 지배 아래서 백성들이 불안하고 괴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죠. 컴컴한 지하세계, 곧 언더랜드였습니다. 그곳에서 앨리스는 졸지에 백성들에게 평화와 행복을 되돌려줘야 하는 전사가 됩니다.
문득 이 영화가 떠오른 것은 팀 버튼이 그린 언더랜드의 그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 때문입니다. 미친 모자 장수, 하얀 토끼 맥, 애벌레 압솔렘, 멋쟁이 체셔 고양이, 뚱보 형제 트위들디와 트위들덤, 겨울잠 쥐와 3월 토끼, 괴물 밴더스내치 등 기상천외한 등장인물들이 흥미를 불러일으키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붉은 여왕의 지하세계’가 주는 그런 이미지입니다. 괴물들이 호시탐탐 염탐하고 괴롭히고, 붉은 여왕의 음험한 웃음이 소름 끼치고, 어딜 가나 싸움이 일어나고….
지난 대통령선거 때 님이 내세운 가장 중요한 슬로건은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였습니다. 채권자와 채무자, 사용자와 피고용인, 갑과 을, 원청과 하청, 다수자와 소수자, 이 모든 사람의 꿈이 이루어진다고 하니 애초 어불성설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뢰와 원칙’이라는 브랜드 아래 언제 어디서나 이 약속을 다짐하고 또 다짐했으니, 일단 믿고 보자는 쪽으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돌아섰던 것 같습니다. 원더랜드를 꿈꾸게 된 것입니다. 그 꿈은 한동안 계속됐죠. 그런데 웬걸 조각 과정에서 이상한 장군에 이어 이상한 학자, 기이한 사업가, 이상한 정치인들이 계속 등장하면서 분위기는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정상회담 중 대변인이 인턴을 성추행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나, 국정원이 정치를 말아먹질 않나, 기이한 퇴행이 곳곳에서 벌어졌습니다. 게다가 위태롭게 이어지던 평화가 언제 깨질지 모르는 긴장 속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건 원더랜드가 아니라 언더랜드로 떨어지는 것 같기만 합니다. 붉은 여왕이 군림하고 괴물들이 억압하는 그런 언더랜드 말입니다.
굳이 상황을 꼬치꼬치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엊그제 ‘5차 국민 촛불대회’에서 박원석 의원은 이렇게 말했죠. “우리는 대통령을 뽑았지, 여왕을 모신 게 아니다.” 대명천지에 국정원이 멋대로 정치공작을 하고, 대통령은 그것을 두둔하며, 여당은 국정원 보호를 위한 좀비가 되는 걸 보고 한 말이었습니다. 혹시 님이 아버지처럼 왕이 되고 싶어하는 건 아닐까?
과거에 왕이 되고 싶은 대통령들은 중앙정보부나 안전기획부를 정권보위부로 운용했죠. 주권 행사를 제한하고, 기본권을 유린하고, 감시와 억압을 상시화했습니다. 님이 휴가지인 저도에서 그리움에 젖었던 아버지는 그 상징이었습니다. 국민이 선택한 정부를 뒤엎고 권력을 찬탈할 때는 군의 무력을 이용했고(5·16 쿠데타), 영구집권 곧 박씨 왕조를 세우고자 할 때는 중앙정보부를 앞세워 유신 쿠데타를 일으켰죠.
설마 아버지 시절 각인된 기억이란 게 고작 그런 중앙정보부에 의한 정치공작만은 아니겠죠. 북쪽의 김일성 왕조를 따라 남쪽의 총통으로 군림한 아버지는 입법·사법·행정부 모두를 손안에 틀어쥐었습니다. 대통령 맘대로 국회의원을 재적의 3분의 1이나 뽑았습니다. 대통령은 그런 국회나마 언제든 해산할 수 있었으며, 사법부는 법이 아니라 대통령이 발동한 긴급조치에 따라 판결하도록 했습니다. 이런 해괴한 언더랜드를 작동시키는 운영체제의 핵심은 중앙정보부였습니다. 그 힘이 얼마나 막강했던지, 중정은 하드웨어인 유신체제 자체를 파괴하고 스스로 몰락하기도 했죠. 그런 중정을 되살리고 싶은 건 아니겠지요? 지금 집권 여당은 청와대와 국정원의 방패막이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그때 그 시절처럼. 그러다 보니 국회는 기능이 마비됐고, 정치는 실종됐으며, 야당은 거리로 나섰습니다. 언더랜드로 가는 전철 같지 않습니까?
지난번 휴가지에서 님은 페친에게 부친에 대한 추억을 전했습니다. 문장은 비문이지만, 그 내용은 절절했습니다. “35여 년 지난 오랜 세월 속에 늘 저도의 추억이 가슴 한 켠에 남아있었는데 부모님과 함께 했던 추억의 이곳에 오게 되어서 그리움이 밀려온다.” 많은 이들이 님의 그리움에 가슴이 뭉클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불길한 예감만 들었습니다. 원더랜드가 아니라 언더랜드로 가는 비밀이 엿보였기 때문입니다. 님에게 부친은 절대선이요, 절대적 준거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님의 선택은 그 궤적의 진폭만 작아졌을 뿐 전체적으로는 아버지의 그것과 닮은꼴입니다. 하긴 그의 후광만으로도 집권 기반과 통치 기반이 탄탄해 보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도 해보지만, 너무나 위험합니다. 아버지의 당시 선택도 불행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기억에서 벗어나기 바랍니다. 적어도 이 나라의 평화와 국민의 행복을 위한다면 서둘러 지워버려야만 합니다. 왕이 되려던 대통령, 중앙정보부와 정치공작, 총과 쿠데타, 감시와 사찰, 협박과 강요, 뇌물과 부패 등 그 시대를 상징하는 열쇳말들입니다. 지금은 되살려서도 안 되고, 되살릴 수도 없는 말들입니다. 님은 그 폐쇄된 기억의 궁전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 한 님의 정부는 모두의 꿈을 억압하고 깨어버리는 나라로 만들 겁니다.
요즘 청와대에서 하는 일을 보면 착잡합니다. 님을 더 깊은 기억 속에 가둬두려는 것 같습니다. 휴가지 소식을 알릴 수야 있겠지만, 시시콜콜 중계까지 할 일은 아닙니다. 영국의 상업 매체들이 왕실 가십을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대는 것 같았습니다. 국정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없는 영국 왕실의 일상이야 가십 차원에서 입줄에 오르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정에 대해 무한대의 책임과 의무를 지닌 님은 그 처지가 다릅니다. 지금도 국민의 부름에 답할 사안이 잔뜩 쌓여 있습니다. 당장 현안이 되고 있는 생활물가, 경기침체, 실업 등의 민생은 물론이고, 우왕좌왕하는 정부 부처들, 여전히 빈 채로 있는 정부 요직들 그리고 헌법적 가치의 훼손과 정치의 실종 등. 이런 문제에는 침묵하면서 개인적 추억이나 월남치마 패션 혹은 휴가지 화보 따위만 쏟아낼 수는 없는 일입니다. 혹시 여왕이길 바라는 건 아닌가요.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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