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무 스포츠부 선임기자
한국과 일본의 축구대표팀 라이벌전이 열릴 때면, 두 나라 기자들 사이의 취재 열기도 뜨겁기 마련이다. 그런데 일본 기자들 중에는 취재 경험이 많은 프리랜서가 적지 않다는 점이 좀 다른 것 같다. 지난달 열린 2013 동아시안컵 때 파주 축구국가대표팀트레이닝센터(NFC)에서 홍명보호 훈련을 지켜보던 중, 3년 전 일본에서 열린 한-일 친선경기 때 봤던 한 프리랜서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모토카와 에쓰코라는 여성인데 축구만 19년 이상 담당했다고 했다. 한국말을 구사하는 그와 달리 일본말을 거의 못하는 것이 미안했지만, 서툰 영어로 대화를 나누며 중요한 사실과 교훈도 얻게 됐다.
“한-일 축구는 라이벌이자 중요한 협력자다.” 그는 홍명보호 피지컬 코치인 일본인 이케다 세이고(53)에 대해 얘기하면서 이렇게 강조했다. “현재 에프시(FC)서울, 성남 일화, 울산 현대 등 세 팀에도 일본인 피지컬 코치가 있다. 일본인 코치가 한국팀을 지도하고, 한국 선수들은 일본으로 진출한다. 현재 60명 이상이 일본 제이(J)리그에 진출해 뛰고 있다. 한 클럽에 보통 2~3명이 한국 선수다. 2부 리그에는 한국 선수들이 더 많다. 한국 선수들은 재능이 있고, 몸값도 비싸지 않기 때문이다. 축구를 통해 두 나라 관계가 매우 깊어지고 있다.” 그는 “홍명보 감독과 이케다 코치가 한-일 축구 협력관계에서 리더”라고도 했다.
일본 프리랜서와의 만남은 유익하게 끝났다. 그리고 며칠 뒤 서울 잠실에서 한국과 일본의 남자부 최종경기가 열렸다. 그런데 경기 휘슬이 열리기 전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대형 펼침막이 ‘붉은 악마’ 쪽에 내걸렸다. 바로 직전에는 이순신 장군과 안중근 의사 영정을 담은 대형그림이 올려지기도 했다. 앞서 반대편에 있던 일본 응원단 쪽에서는 과거 군국주의의 상징인 ‘욱일승천기’를 꺼내 흔들다가 철거당하는 소동도 벌어졌다.
3년 만에 한일전을 취재하면서 ‘이건 아니다’ 싶었다. 응원단 쪽에서는 소동이 벌어졌지만, 선수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싸웠고, 일본이 2-1로 이겨 동아시안컵 우승 트로피를 가져갔다. 일본 프리랜서를 현장에서 만났으면 서로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이런 사태에 대해 일본 정부는 유감을 표명했고, 일본축구협회는 항의 문건까지 보냈다. 붉은 악마는 “…이유를 불문하고 서포터스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 점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내용의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대한축구협회의 펼침막 철거에 항의해 후반전 응원을 중단한 것에 대한 사과였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우리 글로 우리 선수들에게 정신무장을 시키는 선조의 명언이 정치적인 문구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 경기장엔 전범기가 휘날렸고 우리보다 더 선정적인 걸개가 걸려 있었다”며 일본 쪽의 선도발을 거듭 문제 삼았다. 축구협회도 “일본 응원단이 대한민국 수도 한가운데에서 대형 욱일기로 응원한 사실은 외면한 채, 일본이 한국 쪽의 행위만을 부각시키는 태도는 중단돼야 한다”고 했다.
일본이 먼저 도발했다며 비슷한 행위를 하고서 상대 쪽을 탓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축구 경기에서도 상대 반칙에 보복성 반칙을 하는 것을 더 나쁜 행위로 규정하고 엄벌에 처하지 않는가? 붉은 악마와 축구협회의 대응은 정당하지 못하다. 축구장은 주의·주장을 관철시키는 정치판이 아니다. 선수들은 당당하게 기량을 겨루고, 팬들은 순수하게 응원하는 그런 성숙한 문화가 필요하다. 일본이 이길 수도 한국이 이길 수도 있다. 그게 축구다. 졌다고 ‘국치’ 운운하는 식은 구시대적인 생각이다. 한일전은 한풀이의 마당이 아니지 않은가? 달라진 한일전을 기대해본다.
김경무 스포츠부 선임기자kkm10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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