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기자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인식이나 대응은 1년 전 대선후보 시절의 과거사 문제 때와 꼭 닮았다. 인혁당 사건에 대해 “대법원 판결이 두가지로 나왔다. 앞으로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2012. 9. 10. 손석희의 시선집중)고 한 박 대통령의 발언은 유신독재 등 어두웠던 과거를 옹호하는 것 아니냐는 국민적 비판을 낳았다. 그러나 그는 인혁당 피해 가족들이 “동의하면 찾아가 뵙겠다”고 개별적인 사과 의사를 밝히면서도 아버지가 저질렀던 민주주의 파괴 부분에 대해서는 평가하기를 거부했다.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 70여명이 지난 대선 때 야당 후보를 비방하고 여당 후보는 띄워주는 댓글과 게시글을 무수히 작성했고, 경찰은 그러한 내용을 알았으면서도 혐의가 없다고 수사 결과를 축소은폐했다는 사실을 검찰이 밝혔는데도 박 대통령은 “작금에는 부정선거까지 언급하는데 저는 지난 대선에서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고, 선거에 활용한 적도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자꾸 사과하고 책임지라고 하느냐는 항변이다.
박 대통령과 국민 사이에 커다란 벽이 가로놓여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작금’의 문제는 선거 부정을 주장하는 촛불시민이나 원외투쟁을 하는 야당이 아니라 민심에 귀를 막고 있는 박 대통령에게 있다.
첫째, 박 대통령은 국정원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책임있는 당국자이기 때문이다. 대통령 직속기관인 국정원의 일탈에 대해 최고 국정책임자인 대통령이 사과하지 않으면 누가 하는가. 잘못이야 이명박 정권 때 있었지만, 그 잘못에 대한 포괄적 책임은 국가기관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현직 대통령이 져야 한다. 국정원 사건에 대한 대통령의 사과는 개인적 잘못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앞으로 동일한 범죄를 국가가 저지르지는 않겠다는 국민에 대한 약속이다. 민주주의 국가의 집권자로서 이러한 다짐을 머뭇거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둘째, 박 대통령은 국정원 범죄와 무관한 제3자가 아니라 수혜자이기도 하다. 국정원의 댓글 공작을 요청하거나 이를 적극 활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윤리적 또는 정치적으로도 떳떳한 것은 아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누구를 위해 댓글 작업을 지시했겠는가. 또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은 무슨 생각으로 경찰 명예에 먹칠을 하면서까지 수사 결과를 조작했겠는가. 이들의 행동이 대선 결과에 얼마나 영향을 줬는지는 아무도 판단할 수 없지만, 적어도 박 대통령에게 도움이 됐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민주당이나 그 지지자들로서는 국정원 사건으로 선거 결과를 도둑맞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승자로서 그런 피해의식이 있는 사람들에게 정치적 금도가 아니라고 비난할 게 아니라 따뜻하게 위로해야 문제가 풀린다.
과거사 파문으로 대선 지지율이 크게 떨어지면서 대선 구도가 흔들리자 박 대통령은 인혁당 발언 2주 만인 9월24일 “5·16,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며 국민에게 고개 숙였다.
하지만 국정원 사건에 대해서는 사과를 하거나 반성할 것 같지 않다. 지지율이 60%대로 상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청와대는 야당 대표의 거듭된 대화 제의를 거절하는가 하면 국정원은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등에 대한 내란 예비음모 사건을 들고나오는 등 국정원 개혁과 거꾸로 가는 분위기다. 사실관계가 더 확인돼야겠지만, 물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별 힘이 없는 사람들이 내란을 꾀했다니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개혁당할 궁지에 빠진 국정원의 생존전략이 아닐까 하는 생각부터 솔직히 든다. 박 대통령이 국정원 문제에 실기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면 지지율 추락은 순식간이다.
김종철 기자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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