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은 참으로 끔찍했습니다. 전례없는 무더위에, 전력난까지 겹쳐 모두가 지쳐 기진맥진했습니다. 누구보다 1와트의 전력이라도 아끼려 냉방시설을 끄고 지냈던 님과 공직자들은 더욱 힘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 서슬이 아무리 시퍼레도 계절의 오고감을 막지는 못하나 봅니다. 이제 8월이 가고, 가을의 길목인 9월이 되었습니다. 한낮의 햇살은 여전히 따갑지만, 끝물의 여름이 아침저녁 불어오는 소슬바람을 이겨낼 재간이 없습니다. 저 푸른 하늘이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그렇게 푸른 날에 어두운 생각을 하고 있자니 나 자신이 처량해집니다. 걱정은 마십시오. 엊그제 이석기 의원이 ‘민주주의’를 거론하는 걸 듣고 울컥해서 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체포동의안 처리를 위한 본회의 개최를 요구한 새누리당의 제안을 두고 한 말이었죠. “만약 야당이 체포동의안에 동의한다면 역사는 민주주의를 죽인 날로 기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의 체포 동의안을 놓고, 본인이 민주주의를 걸고넘어지다니요. 물귀신도 가지가지입니다. 이미 그의 조직원 세 사람은 구속된 상황에서 저만 국회의원의 특권 뒤에 숨으려는 것도 비겁한데, 민주주의까지 거론하니 기가 막혔습니다.
‘민주주의라고? 무슨 민주주의?’ 혈압이 오르고 격한 반문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제도의 허점을 이용해 공당의 선거 절차를 유린하고, 그렇게 얻은 금배지를 지키려 수많은 동지들을 희생시키고, 공당을 분열시키고, 나아가 북 체제를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인가?”
해방 후 우리는 권력자들의 사이비 민주주의 때문에 너무나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박정희는 한국식 민주주의를 앞세워 이씨 및 박씨 왕조를 세우려 했습니다. 그 아류인 전두환도 새시대 민주주의를 주창했습니다. 모두가 김씨 왕조의 근간을 이루는 조선인민민주주의 체제와 유사하거나 그것을 본뜬 것이었습니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민주주의의 근본 원칙을 파괴하고, 최고권력자가 곧 주권자인 체제를 구축하면서 민주주의를 참칭한 것이었죠. 민주주의를 파괴하기 위한 그들만의 민주주의였죠.
이석기류의 민주주의는 어렵지 않습니다. ‘거기(북)는 모든 행위가 애국, 우리(남)는 모든 행위가 반역’이라는 그의 말 한마디로 설명될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도 말했다죠. “최종 결전의 결사, 미국놈과 붙는 대민족사의 결전기에 … 통일혁명의 선두 역할을 한다면 이 또한 영예롭지 않은가.” 선두 역할에는 정치적인 것뿐 아니라 군사적인 것도 필요하다고 자상하게 덧붙였죠. 그래서 참석자들의 토론 과정에서 국가 기간시설 파괴, 근무자 포섭, 총기 준비 따위의 이야기가 나왔고. 그의 민주주의엔 ‘민주’가 없습니다.
지난해 5월 통합진보당 사태를 기억하실 겁니다.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선출 과정에 나타난 중복투표, 대리투표 따위의 경선 부정을 둘러싸고 벌어진 막가파식 싸움 말입니다. 바로 그 해괴한 경선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한 인물이, 당시 당내에서 이름조차 생소했던 이석기씨였습니다. 공정한 선거는 민주주의의 전원 스위치와도 같습니다. 그것을 고장 내고 등장해 당을 분당 사태로 빠뜨리더니, 이번엔 시민들이 피땀 흘려 쟁취한 민주주의를 농락하고 있으니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를 옹위하는 통합진보당 조직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국정원과 정치권력의 위협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시민들의 노력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지성과 양심의 순수한 발로에 ‘종북 딱지’를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석기씨는 문제의 강연에서 “진보의 핵심은 자주!”라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고 합니다. 자주란 미제의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할 겁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인민민주주의를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것이겠죠. 누가 얼마나 이런 주장, 이런 등식에 동의할지는 모르지만, 그에게 진보란 ‘반미 친북’의 자주 이데올로기에 다름아니었습니다. 보수 진영에서도 공감하듯이 최고의 진보적 가치란 민주주의와 정의의 확장입니다. 한국식 민주주의와 쌍생아인 조선인민민주주의가 아니고, 혁명 지휘부만 결사 옹위하는 그런 정의가 아닙니다. 그는 국회의원 당선증을 교부받으면서 기자들 앞에서는 ‘정의가 곧 진보’라고 말했죠. 그게 무슨 뜻인가 했는데 이제야 알겠습니다.
돌아보면 파국의 시작은 부정 경선이었습니다. 이씨를 원내로, 그것도 당을 대표하는 얼굴로 밀어넣기 위해서 저지른 부정이었죠. 검찰은 지난해 11월 이와 관련해 20명을 구속, 442명을 불구속 기소했습니다. 과반이 이씨를 위해 부정을 저질렀다는 사람들이었죠. 법적으로야 법원의 확정 판결이 나야 알겠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이씨를 위한 부정에 가담했다가 기소까지 된 상황에서 민주시민으로서 최소한의 양식을 갖고 있다면, 스스로 정치적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최소한의 덕목마저 비웃었죠.
선거 부정 이야기가 나왔으니, 국정원의 대선 공작에 대한 언급을 피할 수 없군요. 북한 체제의 전위를 자처하는 듯한 이씨와 그 조직원들의 인식은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을 갖고 내란음모 사건으로 몰아가는 건 법적으로 무리하기 짝이 없습니다. 법원도 증거인멸의 우려 등 때문에 구속영장을 발부했지, 혐의를 인정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 무리수를 둔 건 국정원의 선거 및 정치 공작으로 조성된 궁박한 상황이 아니면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이씨 부류의 발상과 인식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끔찍하고도 황당무계합니다. 그러나 제 궁박한 처지를 반전시키기 위한 카드로 이 사건을 이용하는 것이나, 여론 재판 형태로 사건을 끌고 가는 것도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님은 이석기씨 사건과는 별개로, 먼저 국정원의 선거·정치공작 문제를 먼저 말끔하게 정리해야 합니다. 불법을 은폐하기 위해 또다른 불법을 저지르고, 그것도 안되니까 내란음모 사건을 터뜨렸다는 것이 누명임을 보여줘야 합니다. 이씨 부류가 공안통치를 정당화하고 공안세력의 존재감을 높여주는 데 더없이 좋은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고 환호할 일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우리의 민주주의를 좀먹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세계인이 부러워한다는 오늘의 이 푸른 하늘, 마음껏 향유하고 싶습니다. 미당 서정주처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에 그리운 사람을 마음껏 그리워하지’는 못해도, 송창식씨처럼 노래만이라도 맘껏 부르고 싶습니다.
곽병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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