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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맹목적 신념의 덫, 그들만의 문제일까요

등록 2013-09-09 15:34수정 2013-09-09 15:39

곽병찬 대기자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23
러시아를 돌아 베트남을 국빈 방문하고 있으니, 지금쯤 여독이 만만치 않겠죠. 그래도 베트남 방문 중 이것만은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참모들이 미리 보고를 했어야 하지만, 이야기의 성격상 감히 할 만한 사람이 없어 보입니다.

베트남엔 해방전쟁 당시 외국군에 의해 학살된 희생자를 기억하는 위령비가 곳곳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곳에선 ‘증오비’ 혹은 ‘죄악 증거비’로 통하는 기념물입니다. 베트남 중부의 꽝남성 투이보촌 마을 들머리엔 이런 비문의 위령비가 있습니다. “투이보오 1967년, 야만적인 미국 군대가 우리의 사랑하는 어르신, 소녀, 어린이 145명을 학살했다. 이 사실을 대대로 마음 깊이 기억하라.”(사실은 한국군이 저질렀지만, 한국군을 미국의 용병으로 미군과 동일시하여 ‘미국 군대’라고 적었다.) 지금까지 꽝남성에서만 확인된 한국군에 의한 양민 학살이 30건, 희생자는 4000여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인접한 꽝응아이성의 한 위령비는 학살 당시 상황을 자세히 증언합니다.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는 기억하리라. 한국군들은 이 작은 땅에 첫발을 내딛자마자 참혹하고 고통스런 일들을 저질렀다. 수천명의 양민을 학살하고, 가옥과 무덤과 마을들을 깨끗이 불태웠다. 1966년 12월5일 정확히 새벽 5시, 쭐라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남조선 청룡여단 1개 대대가 이곳으로 행군해 왔다. 그들은 36명을 쯩빈 폭탄구덩이에 넣고 쏘아 죽였다. 다음날인 12월6일, 그들은 꺼우안푹 마을로 밀고 들어가 273명의 양민을 모아놓고 각종 무기로 학살했다. 모두 죽고 겨우 14명만이 살아남았다. 미 제국주의와 남조선 군대가 저지른 죄악을 우리는 영원토록 뼛속 깊이 새기고 인민들은 전율할 것이다….”

읽기에도 고통스런 내용이지만, 마음에 새겨두셔야 합니다. 앞서 몇몇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했지만, 이런 위령비 앞에 서진 않았습니다. 한국-베트남 우호비 따위의 사기성 짙은 비각 앞에서 미래 운운하며 악수나 했죠. 님도 그중의 한 사람이 되겠지만, 다른 분들과 달리 님은 꼭 베트남전과 한국군의 구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부친이 결정하고 주도한 일이었으니까요. 부친은 생전에 베트남 참전을 가장 큰 업적 가운데 하나로 꼽아 자랑하곤 했죠.

전쟁 당시 미군은 주민과 직접 마주치는 마을 수색작전을 기피했습니다. 특히 전투가 치열했던 중부지역에서 그랬습니다. 그건 한국군에게 떨어졌습니다. 낯선 자연환경과 전쟁의 공포 속에서 한국군은 수색작전 시 움직이는 건 모두 적으로 간주하고 죽이고 불태웠습니다. 베트남의 연구자들은 그렇게 한국군에게 희생당한 민간인이 9천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합니다.

참전 명분은 잘 아실 겁니다. 모든 학교에서 똑같이 가르쳤으니까요. 인도차이나 반도의 공산화를 막고, 자유와 평화를 지키는 전쟁, 인도차이나가 공산화되면 한반도도 위험하다! 그러나 참전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군사정변을 통해 집권한 부친의 쿠데타 정권이 미국 정부로부터 승인을 받는 것이 하나고, 둘째는 외화벌이였습니다. 개인적이고 또 잘못된 목적을 위해 미국의 제국주의 전쟁에 용병으로 우리 젊은이들을 보낸 것입니다. 1964년 1973년까지 10년간 32만5000명이 참전해 1만5000여명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왜 잘못이었는지 모른다고 하시지는 않겠죠. 그건 님의 오늘 베트남 국빈 방문 자체가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북베트남이 미군을 몰아내고 베트남을 통일했습니다만, 그 뒤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인도차이나 반도가 공산화됐습니까, 혹은 베트남을 통일한 공산정권이 한국 혹은 세계인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협했습니까, 북한이 다시 남침이라도 했습니까.

공연히 상처를 건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실은 G20 정상회의 참석차 러시아로 출국하기에 앞서 한 발언 때문에 걱정돼서 몇 마디 건네는 것입니다. 러시아 국영통신 <이타르타스>와의 인터뷰에서 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죠. “아버지는 저에게 있어서 국가관이나 또 정치철학을 제가 형성하는 데 가장 영향을 미치신 분입니다.” “(아버지는) ‘어떻게 하면 가난에서 벗어나서 우리 국민이 한번 잘 살아보나 오직 그 하나의 일념으로 모든 것을 바치고 가신 분’이죠.” 그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가 가진 모든 열정, 관심, 시간을 국민 행복에 바치겠다’고 덧붙였습니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베트남 국빈 방문을 앞두고 그런 이야기를 하다니 의아스러웠습니다. 그 말을 베트남 정부 관계자들이 읽었으면 심정이 어땠을까요. 저 부녀 대통령은 우리 베트남과 무슨 악연인가, 아버지는 47년 전 군대를 보내 끔찍한 일을 저질렀고, 그 딸은 지금 위험천만한 원전이나 팔아먹으려고 방문해?

박근혜(왼쪽부터) 새누리당 대선 후보,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선 후보,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가 10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에서 열린 제18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 TV 토론회에 앞서 기념 촬영을 마친 뒤 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박근혜(왼쪽부터) 새누리당 대선 후보,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선 후보,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가 10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에서 열린 제18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 TV 토론회에 앞서 기념 촬영을 마친 뒤 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하지만 역사에 대한 무지 혹은 무관심보다 더 걱정되는 건 아버지와 일체화되어 있는 님의 신념 체계입니다. 지난 6월 현충일 기념식에서 마주친 이정희 통합민주당 대표와의 악수 장면은 한동안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때 님이 지은 미소를 두고 수많은 해석이 쏟아졌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건 한 삽화에 등장한 ‘웃어도 웃는 게 아니야’라는 말풍선이었습니다. 지난해 대통령 선거 막바지 티브이 토론에서 이 대표가 님에게 쏟아부은 비수들은 그만큼 인상적이었습니다. 지난 대선은 한반도에서 성 권력의 역사를 뒤집어 놓는 출발점이었습니다. 세 명의 후보 가운데 두 사람이 여성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차기 대권에 가장 가까이 가 있었고, 다른 사람은 한때나마 정치인의 미래상으로 각광받던 사람이었습니다. 2000여년 동안 남자들이 주물렀던 정치권력이 바야흐로 여성에게 넘어가는 듯했습니다. 당시 두 사람은 완전히 대척점에 서 있고, 어중간하게 남성인 문재인 후보가 있었기에 그런 인상은 더욱 강했습니다.

사실 두 사람은 상극 같아 보이지만 신념 체계에 대한 집념만큼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님은 부하에게 피살당한 독재자의 딸로서 18년 세월을 절치부심하던 끝에 정치인으로 부활했고, 14년 만에 아버지의 권좌를 되찾기에 이르렀습니다. 그사이 님을 지킨 신념은 앞서 본인이 말한 바로, 그 아버지에 대한 믿음과 아버지와의 일체화입니다.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버팀목이었습니다.

반면 이정희 대표는 동정심 많고 공부만 잘하는 착한 범생이로만 비쳤습니다. 진보세력의 통합을 주도적으로 성사시키고, 민주당과의 정책연대를 이뤄내면서, 진보정치의 차세대 대표로 떠올랐습니다. 그때만 해도 그를 상징하는 건 합리성과 유연성 그리고 진보성과 인간주의였습니다. 그것이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부정경선 사태를 고비로 돌변합니다. 궁지에 몰린 당권파를 지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으면서 그동안 숨겨져 있던 그의 신념 및 행동 체계의 일단이 드러났습니다. 최근 이른바 ‘아르오(RO) 사건’ 속에서 이석기씨와 그의 조직을 지키는 보루를 자처하면서 그것은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신념은 현실 속에서 수정되고 조정되어야 합니다. 신념에 맞춰 현실을 바꾸려 해선 안 됩니다. 후자의 경우 우리는 맹목적 혹은 시대착오적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반미 친북의 신념 체계와 폭력을 불사하는 행동 체계! 그렇다면 님은 어떤가요. 아버지의 유령과 일체화하는 님의 신념 및 행동 체계는 말입니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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