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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얼’ 빠진 역사를 배우란 말인가 / 고명섭

등록 2013-09-22 18:33

고명섭 오피니언부장
고명섭 오피니언부장
“쓰다가 말고 붓을 놓고 눈물을 닦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눈물을 닦으면서도 그래도 또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써놓고 나면 찢어버리고 싶어 못 견디는 이 역사….” 1933년 12월 마지막 날 서울 오류동 가정집에서 <성서조선> 주필 김교신이 이끄는 ‘성서강습회’가 열렸다. 나라 잃은 백성의 수난을 신앙으로 이겨내자고 결의한 동지들의 모임이었다. 이 자리에 강사로 나온 사람이 오산학교 역사교사 함석헌(1901~1989)이었다. 함석헌은 여남은 명의 동지들을 놓고 ‘눈물’로 가득한 ‘고난의 역사’를 나흘 동안 강의했다. 그 강의가 바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다. 80년 전 그 한겨울밤의 의분에 찬 강의를 두고 김교신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가 일순간을 보낸 것처럼 지나갔다”고 일기에 썼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원형은 그렇게 태어났다. 5년 뒤 함석헌은 오산학교를 떠났다. 총독부가 우리말 수업과 우리 역사 교육을 아예 금지했던 것이다. 식민지의 밤은 한없이 깊었다.

겨레의 혼이 짓눌린 세월이 얼마나 혹독했던지 함석헌은 뒷날 이때를 돌아보며 “36년이건만 360년도 더 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근년에 그 시절을 미화하는 주장이 식민지근대화론이라는 이름으로 퍼지기 시작하더니 한국사 교과서에 담겨 검정을 통과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학생들이 이 교과서로 우리 역사를 배워야 할 참이다. 일제가 식민 지배를 해준 덕에 한국이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것이 식민지근대화론의 요지다. 이 해괴한 주장은 일제에 부역한 친일파를 두둔하는 데서 시작해 친일파가 중심이 된 독재세력을 받들고 독재의 후예인 수구기득권세력을 비호한다.

그러나 수구지배세력의 치부를 가리려고 급히 기워낸 이 논리의 넝마는 진즉 실증적으로 논파당했다. 경제학자 허수열 교수가 밝힌 자료를 보면, 1911년 777달러 어름이던 조선의 1인당 국내총생산은 1930년대 중반까지 올라가다가 중일전쟁 이후 줄어들어 1945년엔 616달러까지 떨어졌다. 조선 경제는 일제의 수탈에 시달리다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더 주목할 것은 일본-조선 민족 간 격차다. 주력 산업인 농업만 보자. 일본인은 조선 농업인구의 0.2%에 지나지 않았지만 전체 논의 54%를 소유했다. 또 조선의 쌀 생산량은 1910년부터 1941년 사이 52.3%가 증가했지만, 조선인의 쌀 소비량은 그사이 오히려 줄었다. 일본인 지주들이 증산량보다 많은 쌀을 밖으로 빼돌렸던 것이다. 일본인이 부자가 될수록 조선인은 가난해졌다. 그리하여 일본인 한 사람이 이주해 올 때마다 조선인 다섯 사람이 나라밖 유랑민이 되었다. 일제부역자들만이 일본인들이 독점한 부의 일부를 나눠 가졌다. 식민지근대화론은 일제와 친일파의 눈으로 볼 때야 납득할 수 있는 주장인 것이다.

더구나 근대화의 가장 중요한 지표가 주권의 독립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식민지근대화론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것임이 드러난다. 일제강점기는 겨레의 주체성의 척추가 꺾여 주저앉은 시기였다. 주권의식도 시민정신도 자랄 수 없었다. 이 폐허의 시대를 옹호하는 ‘얼’빠진 책을 교과서라고 만들어놓고 일본에 식민지배 사죄를 요구할 수는 없다. 일제에 그렇게 당하고도 그 치욕을 잊고 만다면 이 나라는 함석헌이 비통하게 외쳤던 대로 “아시아의 대륙에서 태평양으로 나가는 큰길가에 앉아 천년 동안 그 비참한 모양을 하고 앉은 늙은 갈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사람들은 사람은 좋은데 자존심이 없다. 천하를 갖고도 내 나라는 못 바꾸며 우주를 가지고도 내 인격은 누를 수 없다고 생각하여야 자존이다. 자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유가 없다.” 그의 외침이 폐부를 찌르는 시절이다.

고명섭 오피니언부장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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