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정현웅 전집>(청년사)과 <시대와 예술의 경계인 정현웅>(돌베개)을 읽었다. 일제와 분단의 뼈아픈 세월을 한 예술가가 어떻게 통과했는지 세밀하게 기록한 책들이다. 정현웅은 한국전쟁 중에 연합군의 서울 수복을 이틀 앞두고 인민군을 따라 월북함으로써 한동안 남쪽에서는 거론할 수 없었던 미술가였다. 그는 화가였지만 그의 장기는 출판 분야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홍명희의 <임꺽정>, 윤석중 동시집 <굴렁쇠>의 삽화를 비롯해 1930년대 후반 잡지 <조광>과 <여성>의 삽화와 표지화를 도맡다시피 했다. <여성>지의 표지화는 신여성들의 다양한 표정과 복장을 과감하게 등장시켜 당시 여성 독자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함께 일한 시인 백석의 기획력과 정현웅의 표지화 덕분에 이 잡지는 출간되자마자 매진되었다. 단행본 장정에 뚜렷한 변화를 몰고 온 것도 정현웅이었다.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표지 전면을 대담하게 원고지 모양으로 구성했고, 정노식의 <조선창극사>는 봉황과 구름 문양의 민화 기법을 차용했다. 해방 후 나온 <한하운시초>나 황순원의 <목넘이 마을의 개>의 장정도 그의 혼이 스며 있다. 그는 북한에서 고구려 고분벽화의 모사작업을 몇 년 동안 묵묵히 수행했다. 월북 예술인들에 대한 숙청의 피바람을 그래서 피해 갈 수 있었다. 1976년 세상을 뜬 이후, 미국에 살던 부인 남궁요안나씨는 1990년 방북해 두 번째 부인 남궁련을 만났다. 이산의 슬픔은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 트위터 @ahndh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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