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욱의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우리나라에 포스트모더니즘은 유행처럼 왔다가 덧없이 스러졌다. 그것이 표방하는 해체론 철학의 참된 취지는 정착하지 못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체제를 옹립하고 자본을 수호하는 용도로 차출되어 많은 이의 정신을 좀먹고 있다.
단순히 말해 자크 데리다의 해체론은 형이상학의 해체를 요구한다. 형이상학은 모든 것을 이분법으로 나누어 한편에 진리·선·아름다움을 놓고 다른 편에 그에 대립되는 허위·악·추함을 둔다. 이런 이항대립 구조에서 불평등한 억압과 차별이 발생한다고 보고 데리다는 ‘해체’라는 새 인식의 지평을 열었다. 다양성과 차이를 인식하자는 이 운동은 역사학에서 유럽·백인·남성 중심의 역사 서술이 극복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비주류와 소수의 소리 없는 아우성도 들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땅에선 새삼 이상한 차별이 보인다. 역사의식이 없는, 옳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궤변들이 기존 권력의 타락한 목적에 부응하여 참된 논리를 나무란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또다른 기수 미셸 푸코는 인간 도처에 권력이 스며들어 있다고 논파했다. 국가권력만이 권력이 아니라 학교·병원·가정 같은 곳에도 권력관계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곳에 정치가 침투해 있을 수밖에 없다. 푸코의 논지의 핵심은 무엇일까? 모든 것이 정치적이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라는 것일까? 아니다. 공권력이나 재벌이나 족벌 언론이 갖는 거대 권력의 폭력성을 직시하고 그 틀을 해체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의 내면에 존재할 수도 있는 차별과 억압의 기제에 결코 경계를 늦추지 말라는 것이다.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와 ‘좌편향’ 교과서에 모두 ‘정치적’ 관점이 스며들어 있기에 마찬가지라는 논리가 펼쳐지고 있다. 오도된 포스트모더니즘의 단적인 예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해체론의 진의를 모른다면 그 논리를 펼치지 말아야 할 것이며, 혹시 알고 있다면 왜곡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조한욱의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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