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대통령은 외국에만 나갔다 오면 짜증을 냈습니다. 특히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이 계파 싸움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겁니다. ‘내각제 개헌 각서 파동’이 났을 때였을 겁니다. 외국 순방에서 돌아오는 길에 노태우 대통령은 기자들에게 농담 삼아 “외국에 나오면 돌아가기 싫다”고 하기도 했죠.
사실 노 전 대통령 시절만큼 한반도 주변 정세가 불안정에서 안정 쪽으로 급변한 적도 없을 겁니다. 전임자이자 후견인이었던 전두환의 5공 시절 남북은 물론 동서가 가파르게 대치했던 것과는 판이했습니다. 소련과 중국은 물론 체코 등 동유럽 국가들과 차례로 국교를 맺었습니다. 게다가 북한과는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을 했고, ‘남북 기본합의서’를 채택했으며, ‘비핵화 선언’도 했습니다. 한반도는 평화의 급물살을 타는 듯했습니다.
물론 이는 본인의 노력보다는 국제 정세가 한반도의 평화를 추동하는 쪽으로 바뀐 결과일 수 있습니다. 소련이 해체되고 동유럽에 자유화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소련이나 중국은 이런 흐름 속에서 사회주의권의 단합, 서방과의 경쟁 정책 등을 지속할 수 없었습니다. 그럴 만한 힘을 상실했던 것이죠. 세계의 화약고였던 한반도는 새로운 변화를 시험하는 리트머스시험지가 되었습니다. 동서의 대치를 완화하고 협력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데 한반도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비록 30억달러의 차관을 주고 국교를 ‘매수’했다는 비판을 피하긴 힘들었지만, 국제 정세의 흐름을 잘 읽고 적절히 이용했다는 평가까지 부정할 순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노태우 대통령은 외국에만 나갔다 들어올 때면 진저리를 쳤습니다.
그런데 그런 대통령이 노씨만은 아니었습니다. 외국 정상에 대한 막말로 국익에 막대한 손해를 끼친 김영삼 대통령이나, 세일즈 외교를 한다며 얕은 장삿속만 드러내 빈축을 산 이명박 대통령도 ‘오대륙 육대양을 넘나들며 국익을 위해 그렇게 고생했는데 정치권은 허구한 날 정쟁만 하고 있으니 도대체 이래서야 되겠는가?’ 이런 불만을 드러냈죠. 그럴 순 있지만, 국내 정치는 정치권만의 책임일까요? 3당 합당과 내각제 추진 밀약은 노태우씨가 주도한 것이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정치는 정당에 맡기고 자신은 세일즈 외교에 전념하겠다고 했지만, 4대강 사업이나 미국산 쇠고기 전면개방 밀실추진 등으로 국내 정치를 엉망으로 만든 건 바로 그 자신이었습니다.
정상외교란 것도 사실 대통령 한 사람의 열정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회담이 특별히 진을 빼는 게임도 아니란 건 알 만한 사람은 알죠. 이미 실무자 선에서 합의한 문서에 사인을 하고, 준비해 간 덕담을 나누는 게 대부분입니다. 물론 강대국 사이에 낀 우리 같은 나라의 경우 미·중·소 열강들과 무게중심 및 이익의 균형을 찾는 건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의지만 확고하다면 그 틀 안에서 문제를 처리하는 건 실무자입니다. 게다가 아무리 껄끄러운 국가라 하더라도 상대방에게 최상의 예우를 갖추는 게 정상회담이고 정상외교이니, 그렇게 고생한다고 할 일은 아닙니다.
엊그제 대통령께선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아펙)·아세안 관련 정상회의와 인도네시아 국빈방문 등의 일정을 마치고 8일 만에 돌아왔습니다. 주요 20개국 정상회의와 베트남 국빈방문을 위해 6일간의 일정을 소화한 지 한달 만입니다. 앞서서는 미국, 중국, 러시아 등 한반도 주변 세 강국을 차례로 방문해 정상회담을 한 바 있습니다. 대통령은 외국에 나갈 때마다 멋진 패션으로 상대국 국민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지켜봐야 하겠지만, 정상외교의 성과도 컸던 것으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다른 대통령들보다 비교적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그런 외치 때문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박수 소리는 노태우 대통령 때처럼 비행기 트랩을 내려서는 순간 그치곤 합니다. 공항 밖으로 나오면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아우성이 대통령을 맞이하고요. 주요 20개국 정상회의에서 돌아올 때는 참으로 착잡했을 겁니다. 귀국 전까지 끝내기를 기대했지만, 채동욱 검찰총장 찍어내기는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잠복한 듯 보이긴 하지만, 국정원에 이은 검찰의 대화록 정치는 야당을 끓어오르게 하고 있습니다. 여당 쪽도 불편합니다. 공공기관 인사, 즉 대선 이후 논공행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입이 잔뜩 나와 있습니다.
사실 그동안 귀찮은 일은 미루기 일쑤였습니다. 이 정부 출범 초 터무니없는 인사로 잔뜩 상처를 입었던 터라 인사 문제에선 특히 그랬습니다. 감사원장은 벌써 수개월째 공석입니다. 파동 속에서 자리가 빈 보건복지부 장관이나 검찰총장도 그렇습니다. 30~40개의 공공기관장 자리도 비어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선 아무도 대통령에게 진언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권력을 지나치게 집중시켜 놓은 까닭에 권력의 공백이 나타나는 기이한 상황입니다.
그뿐인가요. 기초연금 공약의 틀을 뒤바꾸는 바람에 국민연금 체제가 골병들고 있습니다. 피해가 우려되는 국민연금 가입자들이 대거 탈퇴하고 있습니다. 서민들의 거의 유일한 노후대책이 파산날 판입니다. 오락가락하는 민생·경제 정책은 서민과 중소기업은 물론 부자와 대기업들마저도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사이 생활물가지수는 고공행진을 계속하고, 민간의 소비여력은 고갈 상태에 이르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말하는 ‘민생 전념’이란 말이 루어낚시에 쓰는 먹지도 못하는 ‘가짜 미끼’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런 난맥의 바닥에 깔려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문재인 무력화’ 아닌가 싶습니다. 대통령선거 때야 불법적으로 이용했다고 해도, 당선 뒤에도 정권 차원에서 ‘대화록 공작과 대화록 정치’에 전념하는 까닭이 실은 ‘문재인 무력화’에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입니다. 사실 문 의원은 집권 여당에는 가장 강력한 현실적 위협입니다. 당선자와의 표차는 100만여표, 득표율 차이는 3.6%포인트에 불과했습니다. 게다가 새누리당엔 딱히 내세울 주자가 없습니다. 4년 뒤를 생각하면 끔찍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가 너무 착하고, 정치게임에 능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참고로 1971년 대통령선거 때 박정희, 김대중 후보의 득표 차이는 94만여표였습니다. 득표율로는 8%포인트나 됐지만, 박 대통령은 김대중씨를 제거하기 위해 온갖 짓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대화록을 아무리 흔들고 난리쳐도, 그것으로는 문 의원을 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문제가 있다면 그건 문재인이 아니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문제이니까요.
결코 ‘외치’의 성공이 ‘내치’의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북방외교에선 성공했지만, 이를 통해 3당 합당의 모순과 내치의 잘못을 덮고 갈 수는 없었습니다. 이제 ‘문재인 문제’는 잊기 바랍니다. 단임 대통령으로서 왜 ‘다음’을 걱정합니까. 이제 특히 ‘문재인 잡기’ 따위의 정치게임에 쏟던 힘을 민생 살리기에 쏟기 바랍니다. 올해가 지나도록 민생 회복의 희망이 생기지 않는다면, 아무리 큰 외교적 성과를 거두더라도 민심이 얼어붙는 걸 막지 못할 겁니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