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섭 오피니언부장
1512년 가을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로 복귀했다. 이듬해 2월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바르젤로 감옥에 갇혔다. 메디치 가문의 지도자를 암살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는 죄목이었다. 몇 달 전까지 피렌체 공화정의 제2서기장이었던 마키아벨리는 ‘날개 꺾기’ 고문을 당했다. 밧줄로 두 손을 뒤로 묶어 공중에 매달았다가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무서운 고문이었다. 잘못 떨어지면 머리통이 깨져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여섯 번이나 내동댕이쳐지고도 버텼다. 음모에 낀 적이 없으니 자백할 것도 없었다. 마키아벨리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3월11일 메디치 가문의 조반니가 새 교황으로 선출되자 사면을 받아 쇠사슬에서 풀려났다.
성난 운명의 여신이 일으킨 홍수에 휩쓸린 꼴이었다. 그 홍수에 떠밀려 피렌체 교외 시골집에 유폐돼 쓴 책이 <군주론>이다. 마키아벨리와 동격이 된 그 책이 태어난 지 올해로 꼭 500년 됐다. <군주론>은 수백년 동안 논쟁의 복판을 떠난 적이 없다. 논란은 탄생의 순간에 예비돼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을 핍박했던 메디치가의 군주에게 <군주론>을 헌정했다. 일종의 구직서였던 셈인데, 피렌체 공화정의 최전선에서 일했던 공화주의 파수꾼 마키아벨리가 군주를 위한 조언서를 썼다면 그 책의 정체는 무엇인가? 공화주의 신념을 내장한 책인가, 제목 그대로 군주의 교본인가? 답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갑론을박이 끝없이 이어졌다.
<군주론>의 속뜻이 무엇이든, 그 책을 관통하는 ‘마키아벨리 원칙’이 있다는 건 명백하다. 바로 정치현실주의다. <군주론>에는 정치현실주의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냉혹한 명제들이 넘친다. 주목할 것은 마키아벨리가 강렬한 대비효과를 기대하고서 그 명제들을 썼다는 사실이다. 마키아벨리 시대에 가장 널리 읽힌 정치학 교과서는 로마 공화정의 최후 수호자 키케로가 쓴 <의무론>이었다. 도덕을 비웃는 듯한 <군주론>의 문장들은 <의무론>을 옆에 두었을 때 그 대비가 선명해진다. 군주는 사자의 힘과 여우의 꾀로 무장해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의무론>의 다음 구절을 치받은 것이다. “불의를 저지르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여우의 교활함과 사자의 사나움이다.” 키케로의 악덕이 마키아벨리에게는 미덕이 된다.
키케로가 <의무론>에서 강조하는 덕목이 신의다. “신의를 배반하고도 마치 선한 사람처럼 보이도록 행동하는 사람보다 더 위험한 사람은 없다.” 마키아벨리는 이 신의를 다음과 같이 비틀어버린다. “군주는 자비로운 척, 신의를 지키는 척, 인간적인 척, 경건한 척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성품을 갖추고 실천에 옮기면 위험하다.” 그러면서 “강력하고 확고하게 약속하고 나서 그 모든 약속을 지키지 않은” 알렉산데르 6세의 기만술을 칭찬한다. <군주론>의 위험성이 여기에 있다. 속임수를 쓰고 약속을 뒤집고 강권을 휘두르는 것이 마키아벨리 정치의 참모습으로 통하게 되면 <군주론>은 말 그대로 악을 가르치는 책으로 떨어지고 만다.
마키아벨리의 모든 행적과 저작을 종합해보면, 인민의 자유와 번영이야말로 그가 지키려고 한 최후의 가치였음이 드러난다. 보통사람들이 억압받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자유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공화주의자 마키아벨리의 꿈이었다. 그의 현실주의는 어디까지나 수단일 뿐이다. 마키아벨리의 꿈은 사라지고 사악한 수단만 남아 활보한다면, 정치는 냉소와 불신의 어둠에 빠지고 만다. 키케로는 길 잃은 마키아벨리즘을 향해 경고한다. “공포로 다스리는 자는 결국 공포에 떨게 될 것이다.” 키케로는 선의와 관대함의 힘을 믿는다. “불을 붙이고자 하는 사람이 있거든 불을 붙여주어라. 남에게 불을 붙여주었다고 해서 자신의 불빛이 덜 빛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정치를 되살릴 수 있을까.
고명섭 오피니언부장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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