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문화부장
금요일인데도 이른 아침 김포공항은 북적였다. 색색의 아웃도어 옷을 입은 사람들의 들뜬 표정과 목소리로 가득했다. 요즘 주말을 낀 제주행 왕복 비행기표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란다. 하긴, 가을이다.
새벽 2시까지 야근을 마치고 잠깐 눈을 붙인 뒤 달려나간 공항의 풍경은 좀 낯설었다. 언제부터인가 단풍놀이나 가을여행은 티브이 뉴스에서나 구경하는 남의 일이 되어버렸다. 훌쩍 큰 아이들이 자기 일정에 바쁘고, 예약이나 스케줄 짜기 싫어하는 귀차니즘 탓도 있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늦은 퇴근, 잦은 주말근무에 치이다 모처럼 쉬는 날이면 쌓인 집안일을 하거나 별 성과도 없을 자료들을 들추다 멍하니 티브이만 보기 일쑤다.
스스로 ‘과로사회’에 익숙해져버린 삶, 많은 40대 직장인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기업에서라면 이 나이쯤엔 임원과 사원들 사이 ‘낀’ 간부인 경우가 많다. 젊은 세대 문화는 많이 달라졌다곤 하나, ‘회사 부름’이 우선이고 바쁜 것을 ‘인정받는 증거’라 위안 삼는 이 세대들은 여름휴가 때조차 회사 전화에 ‘대기중’ 모드로 지낸다. 가족과의 주말 나들이가 즐거움보다 의무감이고 고역이라는 이들도 적잖다. <과로사회>의 저자 김영선씨는 “장시간 노동이란 돼지우리에 갇혀 ‘무언가에서 벗어날 자유’가 넉넉지 못한” 한국 사회에서 여가는 수동적이고 파편화되고 휴가조차 단순 피로회복 도구에 불과한 ‘박카스 휴가’에 그친다고 말한다. 40대뿐 아니다. 대체휴가제 도입 당시 적용일수를 놓고 논쟁이 뜨거웠듯, 우리 사회에서 ‘장시간 노동’은 여전히 강력한 이데올로기다.
반란이 필요하다. 아주 사소한 개인적 반란일지라도.
1박2일의 짧은 제주여행. 위아래로 6살 차이가 나는 40대 남녀 12명 일행은 갖은 모양의 구름과 전경이 아름다웠던 어승생이나 4·3 당시 ‘다랑쉬 굴의 비극’ 이야기로만 듣던 다랑쉬의 오름, 사진가 고 김영갑이 가장 사랑했다던 용눈이 오름, 억새풀이 흐드러진 따라비 오름, 일몰이 장관인 차귀도와 수월봉에서 감탄사를 연발했다. 1993년 한겨레 입사자들이 20주년 기념으로 회비 파산과 집단연차라는 ‘거사’를 감행하며 밀어붙인 여행이었다. “부장들이 이리 비우면 신문은 어쩌려고”라는 일부 질시와 질타도 아랑곳 않았다. 퇴사한 2명도 기꺼이 달려왔다.
생각해보면 20년 만의 엠티다. 어떤 일터건 열정 넘치지 않는 신입사원이 있겠느냐마는, 93년 늦가을 20명 ‘열혈청춘’(?)들은 회사의 말림을 뿌리치고 독자적인 엠티를 떠났다. 한국 사회와 한겨레의 방향을 두고 세미나까지 벌이는 자못 치열한 분위기였다.
20년 뒤 여행에서 핏대 올리는 논쟁은 사라졌다. 나이가 들어 여유로워졌을 수도 있고, 아예 생각이 많이 달라진 탓일지도 모른다. 대신 같은 시대에 비슷한 고민을 해온 세월이 함께했다. 나중에 보면 오글거릴 게 뻔한데도 가는 곳마다 유치한 포즈의 단체사진을 찍었다. 버스커버스커의 노래도 좋지만, 달리는 차 안에서 모두를 흥얼거리게 하는 노래는 역시 유재하와 김광석이다.
그리고 모두가 이심전심 한 벗을 떠올리고 있었다. 지난해 초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났던 사진부 김종수 기자. 누구보다 가슴이 따뜻했고 누구보다 현장을 사랑했던 그는 분명 그 사람 좋은 웃음으로 어딘가에서 이 여행을 지켜봤겠지만 ‘왜 좀더 빨리 여행 한번 같이 못했을까’라는 생각을 끝내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니 후회하기 전, 떠나시라. 아무리 삶이 팍팍하고 여유가 없어도 사랑하는 이들과 여행을 떠나보시라. 가을이 마구 달아나고 있지 않은가.
김영희 문화부장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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