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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팍스 코리아나

등록 2013-10-25 20:17수정 2013-10-30 21:47

[토요판/리뷰&프리뷰] 정희진의 어떤 메모
<팍스 코리아나-한국인 시대가 온다>, 설용수 지음
책보출판사, 2009
나는 ‘평화’, ‘우아’, ‘화해’ 같은 안정(?) 계열의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편협한 내 경험에 의하면, 이런 말을 자주 사용하는 이들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남을 열 받게 함. 간혹 타인의 정신을 붕괴시킴. 권력자. 불성실과 무식을 ‘쿨’로 가장.

평화(peace)의 어원은 로마 신화의 평화의 여신, 팍스(pax)다. 한자로는 ‘범’(汎)에 가깝다. 그러니 무서운 말이다. 평화는 가장 당파적인 개념인데 보편적인 가치처럼 인식된다. 일단, ‘평’(平) 자체가 일반화의 폭력을 뜻하는 글자다. 평등(平等)도 마찬가지. 평등 실현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평등의 기준이다.

평화는 수많은 재해석이 이루어지고 있고 의미도 다양하지만, 문자의 원뜻이 너무 강력해 논쟁적인 담론일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 평화는 군사력에 의해 지켜지는 것, 전쟁의 동의어 혹은 하위 개념이다. 사람들이 바라는 평화는 선하고 강력한 통치자가 세상을 평정하는 것이다(물론, 그런 일은 없다). 중간 세력의 난립이나 무정부 상태는 혼란을 연상시킨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도 로마 제국이 정복한 민족 통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후 대영제국의 ‘팍스 브리태니카’(Pax Britannica), 미·소 냉전 체제의 ‘팍스 루소아메리카나’(Pax Russo-Americana),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최근 중국의 부상으로 ‘팍스 시니카’(Pax Sinica)가 등장했다. 이처럼 팍스는 단일 세력에 의한 세계 제패다. “단일 세력”. 이것이 중요하다.

한때 세계 지배를 기획했던 일본도 ‘팍스 재패니아’는 없었다. 그러니까 팍스 코리아나는 셋 중 하나다. 팍스의 의미를 모르거나 망상이거나 ‘강한 한국’의 수사학. 이 책에 의하면 팍스 코리아나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성경과 불경에 그렇게 쓰여 있으며 <정감록>과 <격암유록>에 한반도에 정도령(正道令)이 나타나 세계 만민을 살리고, 오바마 미 대통령이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7~8쪽)

또 다른 근거는 순환 법칙. “고대 이집트에서 발생한 대륙 문명이 로마의 반도(半島) 문명, 영국의 도서(島嶼) 문명, 미국의 대륙, 일본의 도서 다시 한국의 반도 문명으로 당도한다. 기후를 보더라도 한반도가 중심… 인류 문명은 봄 절기의 온대에서 출발하여 여름의 열대, 가을의 냉대(冷帶), 겨울의 한대(寒帶) 문명으로 순환한다. 그러나 인간이 하늘의 섭리를 거역하여 문명이 온대에서 시작하지 못하고 이집트가 속한 아프리카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원래 새롭게 출발할 때는 순리에 따라 온대 지방 한반도에서 이루어진다.”(344~346쪽)

아프리카에 대한 비하도 당황스럽지만 팍스 코리아나의 근거가 겨우 자연 주기상 한국 차례라는 것이다. 이런 논리에 설득되기보다는 이런 책을 쓰는 사람의 정체가 궁금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이런 ‘애국’ 저술가들이 상당히 많다. 실은 내가 이 방면의 책을 매우 좋아한다. 일주일에 하루는 종일 헌책방에 앉아 있다. 의자에서 읽으면 위험하다(웃다가 넘어진다).

일종의 컬트, ‘장르 문학’으로 한국 남성성 연구에 이보다 좋은 교재는 없다. 다만, 내용이 비슷비슷하다는 게 아쉽다.

평화에 대한 욕망은 반(反)평화, 평화를 둘러싼 경합이 평화다. ‘모든 이(平)가 사이좋은 상태(和)’는 존재할 수 없다. 이 불가능한 상태를 약자가 인내함으로써 가능한 것처럼 착각게 하는 것이 평화다. 강자의 양보로 평화가 실현된 경우는 없다. 양보했더라도 그것은 정의지, 관용이나 배려가 아니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어떤 가치도 온 누리에 골고루 퍼지지 않는다. 미국 밖에서 전쟁이 없다면 미국 군수 노동자는 실업자가 된다. 억울한 사람의 마음의 고통은, 뻔뻔한 이의 마음의 평화가 이사 간 것이다. 관용은 개인의 인격이 아니라 사회가 쥐여준 권력에서 나온다. 때문에 ‘없는 자’의 관용은 비굴이나 아부로 간주되기 쉽다.

그러므로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힐링하려고 애쓸 필요 없다. 성숙한 사람은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지 않는다. 마음의 평화는 스스로에게 잠시 속아주는 것.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우리는 삶을 속여 봤자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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