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무 스포츠부 선임기자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억새풀이 출렁대는 골프장. 박인비와 수잔 페테르센 등 요즘 뜨는 스타들의 샷을 보러 온 갤러리가 입구에 장사진이다. 그린 주변에서 칭얼대는 아이 때문에 허겁지겁 코스를 뜨는 아버지도 보인다. 18번홀 그린 위에서 미셸 위가 마치 노파처럼 허리를 굽히고 퍼트를 하는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본다. “굿 샷~!” 곳곳에서 함성도 터져 나온다.
지난달 20일 인천 영종도 스카이72골프클럽 오션코스에서 열린 하나·외환 챔피언십 최종 3라운드 때 풍경이다. 한국에서 열리는 유일의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대회다. 이날 2만8763명을 포함해 사흘 동안 4만6308명의 갤러리가 관전한 것으로 공식 집계됐다. 메인스폰서인 하나금융그룹 담당자는 연신 흐뭇한 표정이다.
돌연 궁금증이 생긴다. 사흘 동안의 이 대회를 위해 하나금융이 과연 얼마를 썼을까? 총상금 190만달러(20억원)를 포함해 70억원. 60명을 넘는 미국 투어 상위 랭커 전원에게 공짜로 제공한 항공료와 숙박료까지 포함해서다. 테니스로 치면 1년에 5개 정도의 실업팀을 운영할 수 있는 거액이라 할 수 있다. 가령 엔에이치(NH)농협은 정구와 테니스 여자팀을 운영하고 있는데, 연간 예산이 13억~14억원이라고 한다. 프로축구 시·도민구단 1년 운영비가 구단당 100억원을 조금 넘는 것을 고려해도 엄청 큰돈이다.
보통 골프대회 하나 개최하는 데 드는 비용은 ‘총상금×3’이라고들 한다. 신한금융그룹은 국내 남자프로골프 메이저급 대회인 신한동해오픈(총상금 10억원)을 한번 개최하는 데 ‘30억원+알파(α)’를 쓴다. 해외 유명 스타들을 초청하면 돈이 더 든다.
금융그룹들이 골프 마케팅을 펼치는 것은 여러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우선 행장 등 고위 간부들은 대부분 골프를 치고 좋아한다. 과거 같으면 테니스가 우리 사회 브이아이피(VIP)들의 주요 놀이였다. 1970~80년대 5공 때 군 장성들이 테니스병까지 두고 즐겼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젠 골프가 대세가 됐고, 금융권에선 이른바 브이브이아이피를 위해 수십억원대의 거액을 마다하지 않고 골프대회 후원에 나선다. 그들에게 프로골퍼들과의 라운딩 기회(1라운드 전날 하는 프로암대회) 등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골퍼들이 세계무대 정상에 서고 있는 상황이라 이를 무조건 비판하는 것도 무리다. 문제는 편중 현상이다.
케이비(KB)금융그룹의 경우 오랫동안 운영해오던 내셔널리그 축구단을 슬그머니 해체하고 다른 구단에 넘겼지만 여전히 골프 마케팅에는 적극적이다. 박인비·양희영·양용은 등 국내 최고 스타들의 메인스폰서로 나서 연간 수억원대를 지원하고 있다. 물론 ‘피겨여왕’ 김연아도 후원한다.
금융권이 골프 마케팅과 스타 마케팅에 주력하는 것도 좋지만, 음지에 있는 종목의 유망 선수들도 적극 후원해줬으면 더 좋은 소리를 듣지 않을까 싶다. 연간 100억원대가 넘는 스포츠 마케팅 비용을 쓰면서 골프에만 편중한다면,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종목의 선수들은 설 자리가 없다.
올해 테니스 종목을 새로 맡아 현장을 다녀봤는데 테니스계 현실은 썩 좋지 않았다. 테니스인들은 1990년대 후반 아이엠에프(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금융권이 운영하던 테니스단은 거의 없어졌다고 아쉬워한다. 현재 케이디비(KDB)산업은행·농협 등이 팀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팀들도 회장이 바뀌면 팀이 없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다. 케이디비산업은행은 행장이 올해 바뀌자 한국 유일의 여자프로테니스(WTA) 투어인 코리아오픈 후원도 끊어버렸다. 양지 못지않게 음지도 배려해주는 게 책임 있는 기업의 자세가 아닌가 싶다.
김경무 스포츠부 선임기자 kk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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