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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안도현의 발견] 매화치

등록 2013-12-04 19:20

매화의 은은하고 헤프지 않은 향기를 ‘암향’(暗香)이라 한다. 중국의 시인들은 눈 속에 피는 매화의 절개를 ‘옥골빙혼’(玉骨氷魂)이나 ‘빙기옥골’(氷肌玉骨)로 표현하면서 칭송했다. 옛사람들은 매화를 통해 맑고 고고한 정신에 이르고자 했던 것이다. 퇴계 이황도 매화를 끔찍이 좋아한 바보였다. 매화치(梅花痴)라고 옆에서 수군거려도 개의치 않았다. 어떤 시에서는 ‘매형’(梅兄)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매화를 형으로 받들었다. 퇴계는 늙어 초췌해진 자신의 얼굴을 매화에게 보일 수 없어 아래채로 화분을 옮기라고 할 정도였다. 사랑하는 대상에게 치부를 보일 수 없었던 것.

<열흘 가는 꽃 없다고 말하지 말라>(휴먼앤북스)는 퇴계의 매화시를 모은 시집이다. 이 책을 번역해 엮은 김기현 교수에 따르면 매화를 소재로 쓴 퇴계의 시는 모두 107편에 이른다. 일생 동안 이처럼 매화에 집중해서 많은 시를 쓴 시인은 없을 것이다. 24행이나 되는 어떤 시에서는 행마다 ‘매’(梅) 자를 넣어 시를 지은 적도 있다. 퇴계와 단양에 살던 기생 두향과의 러브스토리의 매개체 역시 매화다. 이를 실감나게 그린 소설이 최인호의 <유림>(열림원)이다. 퇴계는 1570년 음력 12월8일 70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세상을 떠나는 날 그는 매화분에 물을 주라 당부하고 병석에서 꼿꼿이 일어나 앉은 채로 눈을 감았다. 혹독한 겨울을 통과해보지 않은 자는 이른 봄 매화 향기를 맡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싶었을까.

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 트위터 @ahndh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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