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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재벌 3세의 행복을 위하여 / 김영배

등록 2013-12-08 19:03

김영배 경제부장
김영배 경제부장
국내 굴지의 재벌그룹 주력 계열사 직원 ㄱ씨가 임원으로 승진한 건 지난달이었다. 부장 직급에 오른 지 6년, 사회생활을 시작한 때부터 따지면 24년 만이란다. 지방대 출신에, 경력직으로 입사한 약점을 극복했다며 기꺼워하는 ㄱ씨의 모습에 덩달아 훈훈해졌다. 50살 고개를 3년가량 앞두고 임원 자리에 오른 건 비교적 빠른 편에 속한다고 했다.

연말 재계 인사철을 맞아 승진 소식이 잇따라 전해지고 있지만, ㄱ씨처럼 대기업의 임원 반열에 드는 것은 매우 드문 경우다. 경영 성과 평가기관인 시이오(CEO)스코어 자료를 보면, 지난 6월 말 기준으로 국내 30대 그룹 216개 계열사 임원은 모두 9527명으로, 전체 임직원에 견주면 1.01%였다. 임원 비중은 2008년 1.04%, 2009년 1.06%, 2010년 1.06%, 2011년 1.05%, 2012년 1.05%로 큰 변화 없이 1% 수준이었다. 직원 100명 중 1명꼴로 임원 자리에 오른다는 이른바 ‘1% 룰’을 그대로 보여준다.

1% 룰의 예외는 재벌 총수 가문 후손들이다. 대개 과장이나 부장으로 입사해 10년 안에 임원직에 앉고 30대에 사장까지 승진하고, 40대 중후반이면 부회장을 맡아 최고 권력 직전까지 도달한다. 삼성, 현대차그룹 등 거대 재벌그룹에서 예외 없이 벌어진 현실이다. 탈락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100% 룰’이라 불러도 과히 틀리지 않을 것이다. 재벌가 후손들의 초고속 승진은 성과에 따른 보상이 아니라 기업 경영권을 물려주는 과정임을 요즘 대기업 그룹들의 인사에서 여실히 볼 수 있다. 30대에 사장에 오르고 40대에 부회장으로 오른 것을 설명해줄 어떤 설득력 있는 실적의 근거를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점에서다.

재벌가 후손들의 경영권 장악을 비판하면 재벌 쪽 사람들은 왕왕 이렇게 항변한다. 아니, 중소기업에서 경영권을 물려주면 아름다운 가업 승계라면서 왜 재벌 대기업에는 다른 잣대를 대느냐고. 작은 기업에서야 자신의 지분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지만, 재벌 기업에선 거의 예외 없이 총수 가문의 지분을 몽땅 다 합쳐봐야 5%도 채 안 된다는 사정을 모르고 하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자기 게 아닌 것을 자기 자식에게 물려주는 일이 가능한 바탕에 깔려 있는 절대 조건은 순환출자 구조다. 이 요술방망이 덕에 5%의 지분만으로 자식한테 100%에 가까운 권리를 넘겨줄 수 있다. 내 돈을 자식한테 물려주는 것이야 권리 행사지만, 남의 돈을 이용해 자식 주머니를 채워주는 것은 절도 행각이다. 현행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쉽게 말해선 안 된다. 법을 무시해도 안 되지만, 법 규정에만 얽매여서도 안 된다. 법규는 법의 정신에 비춰 끊임없이 반추돼야 한다. 순환출자 고리가 끊어지더라도 총수 가문의 위세에 눌려 재벌가 후손들의 경영 참여가 한동안 관성적으로 이어질 테지만, 그래도 악의 고리를 끊어내는 작업은 당장 시작돼야 한다.

재벌가 후손들의 턱없는 승진 잔치는 정의의 문제인 동시에 한국 경제의 리스크(위험) 요인이기도 하다. 재능 없는 후손들이 거대 그룹의 경영권 꼭대기에 앉았다가 파탄에 이르러 본인도 불행해지고 수많은 직원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사태를 지금도 눈앞에서 보고 있다. 덩치가 큰 기업일수록 그에 따른 파장은 기업 내에 머물지 않고 온 나라로 퍼진다는 점에서 결코 간단한 상황이 아니다. 제대로 된 검증 절차 없이 재벌 3세들이 기업 권력의 정점으로 한발 한발 다가서고 있는 것이야말로 한국 경제의 최대 리스크라 할 만하다. 자체 재능과 노력으로 임원진 대열에 합류한 ㄱ씨들에게 축하의 송년 인사를 전한다.

김영배 경제부장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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