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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공화국의 위기’와 시민불복종 / 고명섭

등록 2013-12-15 19:02

고명섭 오피니언부장
고명섭 오피니언부장
1971년 6월13일 <뉴욕 타임스>는 여섯 면에 걸쳐서 미국 국방부 기밀문서를 폭로했다. ‘펜타곤 문서’라는 이름으로 통하게 될 이 기밀문서는 미국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가 비밀연구팀을 꾸려 작성한 것이었다. 7000쪽에 이르는 이 방대한 문서에는 베트남전쟁의 기원과 경과에 관한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펜타곤 문서’의 폭로는 베트남전쟁을 강행하던 미국 정부에 결정적 타격을 입혔다. 미국의 군함이 북베트남 어뢰정의 공격을 받았다는 1964년 ‘통킹만 사건’의 조작 가능성이 이 폭로로 처음 알려졌다. 베트남전쟁 확대 명분이 된 이 사건은 뒷날 미국의 자작극이었음이 확인됐다.

‘펜타곤 문서’ 폭로 사태를 관찰한 사람 중에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도 있었다. 아렌트는 ‘정치의 거짓말’이라는 논문에서 이 사태를 면밀히 검토했다. 아렌트가 주목한 것은 정부의 거짓말이 누구를 향한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펜타곤 문서’가 보여준 것은 정부의 기만책이 국내용이었다는 것, 다시 말해 국민과 의회를 속이려는 목적으로 실행됐다는 사실이었다. “적(북베트남)은 진실을 알고 있지만 미국 상원 국제협력위원회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통킹만 사건”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아렌트는 거짓말이 자주 사람들을 현혹하지만, 아무리 노련한 거짓말쟁이도 진실 그 자체를 완벽하게 덮지 못한다고 말한다. “진실은 거짓에 대해 확고한 우위에 있다. 정교한 속임수도 결국 좌초하고 만다.”

아렌트는 이 논문을 포함해 ‘시민불복종’과 ‘폭력론’을 묶어 1972년 <공화국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이 책에서 폭력과 권력의 관계에 관한 아렌트의 통찰이 빛을 발하는 논문이 ‘폭력론’이다. 흔히 권력과 폭력은 본성상 같은 계열의 것으로 이해된다. 폭력이야말로 권력의 본질이라는 것이 정치학의 통념이다. 아렌트는 이런 생각을 단호하게 부정한다. 권력과 폭력은 같은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반대되는 것이다. 아렌트는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는 마오쩌둥의 말에 “총구로부터 나오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폭력이다”라는 말로 응답한다. 왜 그런가. 폭력은 권력의 도구일 뿐이며, 인민의 지지야말로 권력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모든 대의제 공화국에서 권력은 인민에게 있다.” 통치자의 권력은 국민에게서 한시적으로 위임받은 것일 뿐이다. 국민의 지지가 줄어들수록 통치자의 권력은 약해진다. 권력을 만회하려고 통치자가 폭력에 손을 뻗칠 때 국민은 통치자에 대한 동의를 아주 거두어 버린다. 권력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공화국의 위기> 두 번째 논문에서 살피는 것이 ‘시민불복종’이다. 아렌트는 개인의 불복종이 단순한 양심의 표출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힘을 얻으려면 다수 시민을 불복종에 동참시키는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펜타곤 문서’를 폭로한 내부고발자 대니얼 엘즈버그야말로 그런 사회적 차원의 시민불복종을 불러온 사람이다. 아렌트는 “협박에 굴복하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들, 자유가 잠식되는 것을 방관하기보다는 차라리 감옥에 가겠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진실은 드러난다고 말한다. 엘즈버그는 간첩죄로 기소됐지만 결국 무죄로 풀려났고, 엘즈버그 기소를 밀어붙인 닉슨 대통령은 2년 뒤 워터게이트 사건에 떠밀려 물러났다.

“권력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간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권력을 폭력으로 대체하려는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공화국의 위기>에서 아렌트가 보여주는 통찰을 빌려 우리 현실을 보면, 지금 난무하는 정치의 거짓말이 시민의 거센 불복종을 불러오고 그것이 다시 권력의 약화로 이어질 것임을 예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동시에 권력의 약화가 더 큰 폭력을 낳으리라는 예측도 가능한데, 그렇게 되면 ‘공화국의 위기’는 더욱더 커질 것이다.

고명섭 오피니언부장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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