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나의 육체여, 나로 하여금 항상
물음을 던지는 인간이 되게 하소서

등록 2013-12-27 20:50수정 2013-12-27 22:21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검은 피부 하얀 가면>, 프란츠 파농 지음, 이석호 옮김
인간사랑, 1998
“누구에게나 이뤄지지 못한 약속의 땅에 사랑하는 사람을 묻는 일이 한번쯤은 찾아오리라… 사랑하는 사람을 묻을 땅을 파느라 더러워진 옷, 아니 얼룩진 옷… 옷이야 갈아입으면 되지만, 얼룩진 마음은 기억에서 잊혀질지언정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의 마지막 장면, 비행기를 보여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소년이 죽은 여동생을 공항 부근에 묻고 돌아오는 장면을 소설가 김연수는 이렇게 썼다.(<씨네21> 934호)

며칠을 이 문장과 함께 살았다. ‘얼룩진(때론 피 묻은) 옷’을 입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 내가 약자의 삶을 ‘선택’하면, 즉 ‘일부러’ 얼룩진 옷을 입으면 얻게 되는 인식론적 자원이 있다. 한편 그즈음 누군가 내게 요구한 삶의 태도, “쿨 앤 나이스” 하게 보이고 싶은 욕망도 있다.

하지만 나는 당연히 얼룩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정의로워서가 아니다. 남에게 우아하게 보이는 것? 이런 것은 타자성이 주는 지적 쾌락에 비하면 비교할 저울에도 오르지 못한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얼룩으로 인해 감당해야 할 삶이 있다. 얼룩의 이물감, 분노 조절 실패, 사회적 시선과의 싸움….

정신과 의사였던 프란츠 파농(1925~1961)은 “직장을 잃지 않으면서 죄책감 없이 고문하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알제리 독립군을 고문하는 프랑스 경찰을 상담했다. 그들은 이를테면, 지적이고 싶지만 잃는 것은 없었으면 하는, 내가 자주 만나는 유형으로는 페미니즘 관점이 주는 힘과 다양한 지식은 갖고 싶지만 세상과 갈등은 피하면서 기득권은 간직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런 식의 앎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평화 혹은 민주주의를 추구한다는 것은 ‘얼룩진’ 옷을 벗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소외를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것. 사람들은 고통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 행복보다 괴로움이 안전하다. 행복은 지켜야 하는, 피곤한 것이다.

‘오해된 사상가’라는 말을 나는 자주(?) 하는데, 파농도 그에 속한다. 오해는 오독일 뿐이다. 오해와 재해석은 다르다. 전자는 발신자와 수신자의 맥락을 삭제한 채 글자만 가져온다. 재해석은 상호 역사를 모두 고려하는 개입이요, 생각하는 노동이다.

다른 사회로 이행을 꿈꾸던 그의 탈식민주의는 민족해방으로, 폭력을 두려워하는 주체가 해체되는 과정은 폭력의 정당성 논쟁으로, 백인과 동일시하는 흑인은 흑백 대칭으로 오독되었다. 파농의 사상은 백인과 유색 인종의 대립에 관한 것이 아니다. 흑인의 백인에 대한 동일시 욕망, 타자의 범주에 갇힌 이들의 자아를 탐구하는 데 있었다. 헤겔의 노예는 주인으로부터 등을 돌려 대상을 지향하지만, 흑인은 대상을 포기하고 주인을 지향한다.(280쪽) 따라서 변증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36살에 죽은 파농이 27살에 쓴 책이다. 이런 책은 지식만으로 씌여지지 않는다. 1970년 미국의 급진주의 페미니스트 파이어스톤이 <성의 변증법>을 25살에 썼듯이 자기 위치성에 대한 정치적 자각 없이는 가능하지 않는 걸작이다.

파농은 자신의 이미지와 영원한 전투를 벌였고, 그것을 썼고, 소통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고정시키려는 세상에 맞서 투쟁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피부색을 잊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영원히 얼룩진 옷을 입음으로써 얼룩을 인식의 동기와 가치로 만들고자 했다. “타자를 만지고 느끼며 동시에 그 타자를 내 자신에게 설명하려는 노력을 왜 그대는 하지 않는가?” 이 글의 제목은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292쪽)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사족 1. 책 표지에 큰 글씨로 “프란츠 파농의 처녀작!”이라고 쓰여 있다. 처녀작. 이런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무지한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무지해서 나쁜 사람이다.

사족 2. 마음이 굳은 사람이라도 <아무도 모른다>는 두 번 보기 힘든 영화다. 여러 번 보면 김연수 같은 통찰이 가능했을까. 내 감상은 초라하다. 내가 좋아하는 장면은 소년이 자판기마다 거스름돈 출구에서 동전을 찾는 모습이다. 나도 가끔(?) 그런다. 500원짜리를 주운 적도 있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