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훈 국제부장
통일을 왜 해야 하나? 전통적인 답은 ‘한민족이니까’ 정도 되겠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던 백범 김구의 절규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통일의 꿈이 빠르게 사그라들고 있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이 2007년부터 해마다 하는 ‘통일의식조사’를 보면, ‘통일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2007년 63.8%에서 2013년 54.8%로 줄었다. ‘통일이 필요없다’는 의견은 같은 기간 15.1%에서 23.7%로 높아졌다. “통일은 대박”이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 뒤 ‘통일 열풍’을 나쁘게만 볼 수 없는 까닭이다. 박 대통령을 비롯해 ‘통일이 미래다’라며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이는 <조선일보> 등 보수세력의 통일몰이의 핵심 메시지는 ‘통일=경제적 기회’라는 것이다. ‘먹고사니즘’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8천만 한민족 경제공동체 건설은 북녘의 경제적 곤궁, 남녘의 과도한 무역의존도와 경쟁주의를 치유하는 데 결정적 디딤돌이 될 수 있다. 한국이 ‘섬나라’에서 벗어나 대륙으로 뻗어나가는 데도 필수적이다.
통일은 민족이나 먹고사니즘보다 넓은 데로 가는 통로다. 통일 없이 평화는 요원하다.(전쟁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 여기며 사는 건 얼마나 옹색한가.) 통일 없이 민주주의의 심화와 정의의 확산, 질 높은 일상과 행복, 반도 남쪽에 갇힌 상상력의 해방은 불가능하다. 다른 의견을 ‘종북’으로 내모는 세태, 헌법보다 힘센 국가보안법의 존재를 보라. 4·19 혁명과 6월항쟁 직후 민주화운동의 무게중심이 빠르게 통일운동으로 옮아간 데에는 역사적 이유가 있다. 통일의 비전 없이는 평화도 민주도 인권도 정의도 행복도 온전할 수 없다. 그래서 통일을 포기할 수 없다.
통일을 어떻게 할 수 있나? 헌법은 전쟁통일을 배제한다(4조). 남은 건 평화통일뿐이다. 박 대통령과 <조선일보> 등은 통일의 결과만 강조할 뿐 과정(수단과 방법)을 얘기하지 않는다. ‘대박통일론’이 변종 붕괴론으로 여겨지는 까닭이다. 그런데 김정은 정권이 무너지면 북녘이 한국 차지가 될까? 친중국 정권이 들어서거나, 유엔을 앞세운 신탁통치 가능성이 높다. 국제법은 휴전선 이북에서 한국의 우선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전쟁 때 미국이 이승만 정권의 38선 이북 행정권 요구를 묵살하고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을 만든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붕괴론은 현실성도 문제지만, 한국의 우선권을 보장할 수 없다는 점에서 ‘쪽박통일론’에 가깝다.
한국의 우선권을 보장받아 합의통일로 가는 길이 없지는 않다. 북조선 인민의 마음을 얻으면 된다. 독일 통일의 교훈은 흡수나 붕괴가 아니다. ‘마음의 정치’다. 동독이라는 주권국가를 해소하고 서독에 5개주로 편입되기로 결정한 주체는 동독 인민이다. 외부의 강제가 아니다. 동독 인민은 1990년 3월 첫 자유선거에서 즉각적 통일을 약속한 기민련을 집권당으로 세웠다.(통일독일의 3선 총리 앙겔라 메르켈이 이 정부의 대변인 출신이다.) 1969년 이래 정권교체와 관계없이 ‘퍼주기’로 일관해온 서독의 구애가 동독 인민의 마음의 빗장을 연 것이다.
북조선 인민의 마음을 어떻게 얻나? 교류·협력 말고 다른 길이 있을까? 배고플 땐 밥과 일자리가, 외로울 땐 손 내미는 이가 고마운 법이다. 인도적 지원과 개성공단 사업 등이 마음의 강을 건너는 다리인 까닭이다. 한데 모여 일하고, 놀고, 밥을 나누면 그게 바로 통일과 평화의 못자리다. 정화수를 떠놓고 제발 망하라고 비는 이한테 마음을 줄 바보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는가.
이제훈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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