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주 언론인
주변에 이렇게 우울증 환자가 많은 줄 몰랐다. 누가 자살했다는 보도 다음에 평소에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는 사인이 잇따른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금씩은 앓고 있는 게 우울증인데 심해지면 자살로 귀결될 수도 있다고 한다면 한번쯤 자신의 정신상태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나이 탓인지 이런저런 의논이나 상담을 해오는 친구들이 많다. 대부분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호소한다. 준재벌급의 총수, 자신감 넘쳐 보이는 교수, 항상 행복해 보이는 얼굴의 언론인, 자식들도 다 제 노릇 하고 우아하게 사는 귀부인, 대기업의 잘나가는 중견사원, 성공한 자영업자 등 매일매일이 행복해서 절대 우울증 같은 거 안 걸릴 것 같은 사람들도 우울증이라고 한다.
세상 돌아가는 꼴 보니 희망이 없어 보인다는 사회적 우울부터 가족관계, 직장 스트레스, 실패의 두려움, 부부 갈등과 잠을 못 잔다, 매사에 의욕이 없다, 자살을 구체적으로 생각한다, 폭식을 한다, 술로 하루하루를 버틴다, 48시간 동안 게임을 했다, 도박에 빠졌다, 한달 동안 방에 처박혀 땅을 밟지 않았다 등 사연은 제각각이지만 불안과 무기력, 불면, 희망 없음 같은 단어를 공통적으로 많이 쓴다.
돈 많으면 돈을 팍팍 써라, 부부 갈등이라면 이혼을 하라고 하고, 직장을 때려치워라, 그냥 실패해라, 체면이나 실패를 목숨과 바꿀 거냐고 돌팔이식 처방을 내리고 나도 그렇고 누구도 그렇다는 식으로 이야기해주는 게 고작이다. 살면서 헤어날 수 없는 덫이나 미궁 속에 빠졌다고 느꼈을 때 공간을 바꾸거나 누군가와 거리를 두거나 집착을 끊으면 어느 정도 해소되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때로 우울한 기분이 며칠 계속되면 아 이거 위험한데 이거 왜 이러지 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인터넷에 떠도는 우울증 자가진단법을 이것저것 찾아 테스트를 해본다. 보통 40~50점 정도가 나오지만 어떤 때는 치료를 요하는 60점, 중증이라고 말할 수 있는 70점 이상이 나올 때도 있다. 곧바로 규칙적인 운동을 하거나 일상의 틀을 다시 세워 실천하고 햇볕을 많이 쐬라는 충고에 따라 햇볕 나는 날은 무조건 밖에 나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걷는다. 그러는 동안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씩 상승하는 기운을 느낀다.
우울증 증세에 기본적으로 나와 있는 항목들은 나이 들면 당연히 생기는 인생에 대한 허무감을 동반하는 것들이다. 삶의 의욕이 없다거나 모든 것이 시들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우울증 양상이다. 65살 이상은 넷 중에 한 명이 우울증이라고 하니 나 자신은 그러려니 하고 산다. 젊은 사람의 우울증도 어떤 의미에서는 일종의 노인 증상인가 싶기도 하다.
우리나라 국민 중의 5%가 치료를 요하는 우울증이다. 우울증은 약물치료나 상담을 통해 90%는 치료가 된다고 한다. 치료가 아주 쉬운 질병인데 그것을 짊어지고 죽음에까지 이르는 것은 혼자서 끙끙 앓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과 진료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우울증 환자를 정신병자 취급 하거나 사회적 부적응자로 모는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울증 환자에게 봄은 잔인하다. 3, 4월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계절에 자살이 가장 많다. 20대, 대학시절 봄이 되면 우울했다. 개나리꽃이 노랗게 활짝 피고 진달래꽃이 길목마다, 수양버들이 푸릇푸릇 잎을 내밀면 그 생명력이 이상하게 징그럽게 여겨지고 나 자신만 생명의 대열에서 탈락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라일락 꽃이 필 무렵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우울증이 사라졌다.
미세먼지로 보낸 몇달, 황사가 몰려든 봄철, 그리고 닥쳐올 장마철…. 이런 것들이 자살률을 높인 것일지도 모른다. 북유럽 쪽의 자살률이 높고 일조량이 높은 남쪽 나라의 자살률이 낮다는 통계를 보면 햇볕은 우울증에 특효가 있는 것 같다.
의사들은 벗어나겠다는 의욕만 있으면 우울증을 고칠 수 있다고 단언한다. 나만 아니라 누구나 우울증을 조금씩 앓고 있고 벗어나자는 마음만 있으면 벗어날 수 있다는데 왜 병을 키우고 혼자 끙끙대는가. 나 자신은 우울증이 스며들 때 남쪽 나라의 진한 햇볕을 쬔다는 상상을 하면 금방 따뜻하고 행복한 기분에 잠긴다.
김선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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