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징이 중국 베이징대 교수
1990년의 동서독 통일은 한국에 전례없는 통일 열기를 불러왔다. 그렇지만 통일 후 동서독이 겪는 심한 갈등과 서독이 지불하는 엄청난 경제적 대가를 지켜보면서 한국에서는 ‘통일기피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내적 통합을 이루고 세계 4위의 경제대국이 된 독일은 한국이 벤치마킹하려는 흠모의 대상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베를린선언에 이어 박근혜 대통령이 독일에서 한반도 통일 구상을 발표하려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연초부터 박근혜 대통령은 통일대박론에 이어 통일준비위원회 발족으로 한국에 새로운 통일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박 대통령은 왜 통일을 해야 하는가에 관한 당위성을 대내외에 밝혀왔다. 대내적으로는 통일에 대한 냉담증이나 기피현상을 불식하고 대외적으로는 한국 주도의 통일 의지를 주변국들에 강하게 각인시켰다.
박 대통령이 강조하는 통일 당위성과 대박론은 통일을 장밋빛으로 장식하기에 충분한 것 같다. 세계 어느 나라도 선진국 문턱에 들어선 한국처럼 국토와 자원, 인구를 그토록 늘릴 수 있는 나라가 없다. 통일이 가져올 지각변동은 한반도를 영국과 독일에 버금가는 대국으로 발돋움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지역을 세계 경제 중심의 하나로 부상시키기에도 충분하다. 그만큼 통일의 당위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통일을 이루는가 하는 것이다. 박 대통령의 통일 행보는 그의 통일 철학에 따른 수순이겠지만 시기적으로 장성택 사건 뒤의 북한과 겹치면서 북한 급변사태나 붕괴를 염두에 둔 것 아닌가 하는 시각도 없지 않다. 그래서일까. ‘장밋빛 통일’은 있지만 정작 통일의 상대인 북한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한국 주도의 통일이기에 북한은 한국이 이끄는 대로 따라야 하고 따를 것이라고 믿어서일까. 일방적으로 한국이 밀어붙인다는 느낌도 없지 않다. 북한을 피동적으로 ‘통일이 되어야 하는 대상’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외적 통일은 있는데 내적 통합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독일의 통일은 외적 통일을 이끌어낸 뒤 내적 통합, 즉 심층의 통일로 막을 내리고 있다. 독일이 내적 통합에서 겪은 진통은 한때 한국의 통일 열기를 식힌 ‘타산지석’이 되기도 했다.
그러면 지금의 통일 열기는 이 내적 통합을 뛰어넘은 것일까? 동서독의 경제적 차이, 문화적 차이, 가치관적 차이는 남북한의 차이에 비해 훨씬 좁다. 서로의 문이 늘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제쳐놓더라도 남북한과 달리 동서독은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증오심’을 키운 일이 없다.
통일 전 동독과 서독 주민들이 친척방문을 위해 끝없이 늘어섰던 풍경은 남북한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그렇다고 한국이 서독처럼 상대를 자석처럼 끄는 형국도 아닌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외적 통일을 이룰 때의 동서독은 사회통합기반이 지금의 남북한보다 훨씬 탄탄했던 것이다. 그러한 통합기반이 없었다면 기민당이 아무리 결단력이 있었다고 해도 이렇다 할 큰 충돌 없이 내적 통합을 이루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동서독에 비해 남북한의 보이지 않는 장벽은 훨씬 더 두껍다. 충돌로 비화할 수 있는 갈등요소가 도처에 깔려 있다. 어찌 보면 눈에 보이는 장벽을 허물기보다 보이지 않는 장벽을 허물기가 훨씬 더 어려울 수 있다. 독일 통일을 그대로 벤치마킹할 수 없는 이유다.
남북한 통일의 종착역은 내적 통합이라 하겠다. 어떠한 통일이든 내적 통합을 이루지 못하면 합의 통일 후 내전으로 치달은 예멘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 내적 통합이 아닌 외적 통일만 추구하면 새로운 분열을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내적 통합의 시작은 통일 후가 아니라 지금부터라 하겠다. 박 대통령이 내놓은 신뢰프로세스가 바로 그 내적 통합 과정이라 하겠다. 박 대통령이 내놓을 통일 구상은 그 연장선에서 내적 통합의 청사진을 그리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민심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고 했다. 통일이라는 천하에서 절반의 민심은 북한에 있다. 이는 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길은 교류와 협력을 통한 내적 통합밖에 없다. 이 내적 통합의 길을 먼저 걷지 않으면 통일은 다가오면서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진징이 중국 베이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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