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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선주 칼럼] 즐기며 사는 게 최고라니까

등록 2014-04-08 18:51수정 2018-05-11 15:16

김선주 언론인
김선주 언론인
자나 깨나 국가와 민족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나는 신용하지 않는다. 입만 열면 역사와 사회를 거론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일상이 없는 담론은 부정직하고 부정확하기 때문이다. 만나면 돈타령 여행타령 사랑타령만 하는 사람도 지루하다. 요즘 부쩍 만나는 사람마다 ‘즐기며 사세요’라는 말을 많이 한다. 내가 즐거워 보이지 않는가라는 반성도 하지만 한편으론 세상 뭐 별거 있냐 한평생 즐기며 살다 가면 그만이지라는 이야기처럼 들려 한쪽 가슴이 서늘하다. 사회와 역사, 국가와 민족은 없고 오로지 일상만 있는 듯해서이다.

즐거움은 기쁨이고 행복이고 아름다움이며 선일 수밖에 없다. 스무살의 청년이 군대에서 선임들과 냉동식품을 먹다가 폭행을 당해 하루 만에 숨졌다는 기사를 읽고 딱 내 아들의 일인 것 같이 온몸이 저리다. 그러다가 컴퓨터를 끄고 오늘도 즐거운 일을 만들어야지 다짐한다. 이 세상의 이쪽과 저쪽을 왔다갔다하며 양다리를 걸친 것 같아 비루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결국은 오늘의 재미, 내 개인적 일상으로 황급히 돌아간다. 당연하고도 맞는 일일지도 모른다.

길거리에 온갖 현수막이 널려 있다. 빨간색 파란색 이름도 쓰여 있고 공약 같은 것도 줄줄이 나열되어 있다. 시장을 뽑는 것은 알겠는데 뭔 사람이 이렇게 무더기로 나타났는지 구의원 시의원 구청장 등 누구를 뽑는지 구별이 안 된다. 길목마다 늘어선 사람들이 명함을 쥐여준다. 그래도 모르겠다. 정말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투표를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어떤 근거로 투표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투표를 한다고 해서 내가 기표한 것이 정상적으로 계산될지도 의문이다.

정신을 차리고 시청 구청 의회 교육청 등의 누리집을 찾아 돌아다니며 도대체 이런 국가기관들이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지 이번에 뽑을 사람들이 뭐를 하겠다는 것인지 샅샅이 살펴본다. 내친김에 청와대, 국회도 들어가 본다. 청와대 누리집은 ‘소통과 공감’을 내세웠고 국회 누리집은 ‘국민의 마음 국회가 생각한다’고 쓰여 있다. 멋있다. 모두들 대단한데 픽 실소가 나온다.

어떤 아침에는 이 세계가 치유할 수 없이 깊이 병들었다는 생각, 어떤 아침에는 내가 이 세계와 화해할 수 없을 만큼 깊이 병들었다는 생각이 든다.(최승자 시인의 시 <어떤 아침에는> 인용) 내가 병든 것인가, 우리 사회가 병든 것인가…. 대한민국 상공에 북한의 무인정찰기가 이 하늘 저 하늘을 막 날아다니며 사진 찍고 휘젓고 다닌다는데 경복궁 영추문 앞에서 청와대 쪽이 아닌 서쪽을 바라보며 인왕산을 그리고 있는 화가를 청와대 경비가 쫓아 버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또 병적으로 화가 치민다.

일본인 친구는 그래도 한국이 다이내믹해서 부럽다고 한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바다와 땅의 오염이 자신들의 삶을 두고두고 파괴할 텐데도 정작 그 문제를 외면하고 일상을 조용조용히 해나가는 것이 괴이하다고 한다. 정작 꼭 해야 할 일, 해결해야 할 일을 외면하는 것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처럼 두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진짜 절망할 때 공포가 정면에 닥치면 아우성도 못 치고 침묵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우리 사회엔 열고 까발리면 공포와 혼란을 야기할 판도라의 상자가 몇 개나 될까. 적절한 시기에 편리하게 자동적으로 국정원 직원처럼 국민 전체가 기억상실증에 걸리고 싶어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우려까지 든다.

개인의 재미를 아무리 찾아도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을 내 병이 깊은 탓으로 돌렸다.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데 청와대나 국회의원보다 내가 더 낫다는 보장이 어디 있으며 기초의회 무공천을 여야가 다 폐기한 것이 옳고 그른가를 내가 더 잘 판단한다고 어떻게 확신하겠는가.

북악스카이웨이에 진달래가 만화방창인데 그거 안 보고 죽으면 후회한다는 친구의 느닷없는 전화에 웬 진달래 하다가 안 보고 죽으면 후회한다니까… 냅다 차를 몰고 나가는 나…. 그래 즐기자 즐겨….

일상이 정치이고 개인이 역사라고 한다. 지금 이렇게 지내는 나나 우리 모두 대한민국의 정치와 역사의 산물이고 또 이렇게 정치를 만들어 가고 역사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잔인하고 무섭다.

김선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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