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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울지 말아요, 나 여기 있어요

등록 2014-05-02 20:13수정 2014-05-02 20:56

정희진의 어떤 메모
‘천 개의 바람’, 메리 엘리자베스 프라이 지음
1932, 판본 미상
사랑하는 사람, 나를 살게 했던 사람, 삶의 이유였던 사람을 잃었을 때 남은 사람의 남은 시간은 어떻게 될까. 상황은 당사자만이 알 것이다. 그들이 공유한 경험은 고유하다. 어떤 수용력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힘이다. 이것이 인간이 타인으로부터 이해받기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다.

고통스러운 상태를 표현하는 “죽지 못해서 산다”는 말의 요지는, ‘못해서’이다. 죽음을 갈망할 정도의 괴로움 외의 다른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견딘다”, “버틴다”는 표현도 어쨌든 “산다”는 의미인데, 극복하기 힘든 상실감에 처한 사람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싣지 않은 기차처럼 시간이 지나갈 뿐이다.

잃어버린 사람을 가슴에 묻은 후엔 대화를 시도한다. 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다. 이 대화의 가장 큰 고통은 반응 없는 독백이라는 사실을. 그 독백의 실제는 흐느낌과 몸부림, 발광(發狂)이라는 것을. 실연이든 사별이든 모든 상실이 주는 절망은 불러도 대답 없는 현실이다.

타자화에는 여러 가지 내용이 있지만 타인의 말을 자기 뜻대로 재현하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대개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타자화하기에 가장 쉬운 대상은 죽은 사람일 것 같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신체는 말할 수 없지만 죽은 지 천년이 넘은 공자나 백년이 넘은 마르크스는 여전히 말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도 흔히 “이것이 고인의 뜻일 것”, “엄마도 그걸 바랄 거야”라며 죽은 자를 대신해 말한다. 물론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에 어떤 전언도 자기 위로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신체와 영혼의 관계를 알지 못하는 우리는 모두 사이비 유물론자다.

‘천 개의 바람’(A Thousand Winds)은 1932년 메리 엘리자베스 프라이가 영어로 쓴 시다. 오랫동안 작자 미상으로 남아 있다가 1998년 에비게일 밴 뷰런이라는 신문 칼럼니스트가 저자를 밝혀냈다.(http://en.wikipedia.org) 이후 일본의 유명 작곡가 아라이 만(新井満)이 곡을 붙였다. 일본에서 여러 가수가 불렀는데 2007년 클래식 가수 테너 아키카와 마사후미(秋川雅史)의 노래가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나는 그해 엄마를 모시고 일본에 ‘효도 관광’ 갔다가 이 시디를 샀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이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그러다가 임형주의 노래를 듣다가 불현듯 깨달았다. 이 노래의 화자(話者)가 죽은 사람이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천 개의 바람’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고 구전을 거듭하여 다양한 표현이 많다. 내용은 평범하다. “나는 죽지 않았어요. 잠시 떠났을 뿐이에요. 그러니,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말아요. 빛, 비, 바람, 눈이 되어서 당신 곁에 있겠어요. 당신을 항상 지켜보고 보호해 줄게요”. 이 글의 제목은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 없어요”로 시작하는 원작을 내가 의역한 것이다.

우리는 세월호 사건의 어린 희생자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부끄럽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우리만 말하고 우리가 한 말을 우리가 듣기를 반복하고 있다.

잠시 위로의 주체, 우리의 일방성에서 조금 뒤로 물러나 보자. 당사자의 말도 들어보면 안 될까. 그들도 우리를 위로할 권리가 있다. 그들은 ‘천 개의 바람’의 화자처럼 “힘내세요”, “우리가 여러분을 지켜줄게요”라고 말하고 있을지 모른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위로할 수 있다. 적어도 청와대 근방의 산 사람들보다는.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나는 죽은 자와의 대화에서 위로받는다. 내 말을 상대가 들을 수 없다는 무력감, 너무 보고 싶은 마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물어볼 사람이 없는 절망으로부터 조금은 벗어날 수 있다.

물론 그들의 말은 여전히 나의 생각이지만 그들도 하고 싶은 말이 많지 않을까. 그들은 무슨 걱정을 할까. 뭐가 먹고 싶을까. 내가 어떻게 살기를 바랄까. 그들과 나누던 일상적 대화, 떠들고 재잘거림, 타이름… 그들의 말을 들으려는 노력은 현실 부정이 아니라 그들에게 닿으려는 간절함이다. 간절함, 나는 이것이 애도라고 생각한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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