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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소통이 경쟁력인 삼성은 가능할까? / 이봉현

등록 2014-05-21 18:19

이봉현 경제·국제 에디터
이봉현 경제·국제 에디터
40대 초반의 회장은 어색한 분위기를 수습해보려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계열사 사장단을 싱가포르까지 불러 모아 새로운 경영 방침을 힘주어 말한 뒤였다. 나이 지긋한 원로가 마이크를 끌어당겼다. 선대 회장을 도와 그룹을 일으킨 부회장이었다. 그는 별로 에두르는 기색도 없이 “그건 좀 아닌 것 같다”며 회장 말에 어깃장을 놓았다.

재벌들이 외국에서 전략회의를 하는 바람이 불었던 1990년대 중반, 당시 재계 서열 5위쯤 되는 그룹의 전략회의에 동행했다. 좋은 말들이 오간 뒤 “이제 기자들은 나가 달라”는 안내방송이 나왔지만, 애써 무시하고 임원들 틈에 섞여 있다 목격한 장면이다.

재벌 총수는 흔히 ‘왕’으로 불리지만 2세, 3세 회장이 자동으로 리더십을 인정받는 것은 아닌 듯싶다. 창업주의 아들이나 손자일지라도 자신만의 성공 방정식을 제시하고 구현해내지 못하면 앞에서 따르는 척하는 부하만 늘어난다. 카리스마 면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을 것 같은 이건희 삼성 회장도 1993년 ‘신경영’을 선언하기까지 5년 가까이는 존재감이 약했다. 그사이 이병철 선대 회장의 원로 가신들과 ‘궁정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이건희 회장이 붙든 화두는 ‘품질’이었다. 주어진 비용으로 성능과 디자인이 가장 좋은 제품을 만드는 데 역량을 집중했다. 주요 임원을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소집해 이렇게 고함을 질렀다. “모든 것을 양을 없애버리고 질을 향해라(고 5년 내내 강조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양을, 양을, 양을 하고 있는 게 현실이야!” 1995년에는 불량률이 높은 무선전화기 15만대(150억원어치)를 공장 마당에서 부순 뒤 불을 지르는 충격요법을 쓰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품질은 삼성의 디엔에이로 자리잡았다. D램 하나뿐이던 삼성의 세계 1위 제품은 이제 20개가 됐고, 세전이익은 8000억원(1993년)에서 38조원(2013년)으로 늘었다.

이건희 회장의 와병이 길어지며 이재용 부회장으로의 3세 승계가 임박한 것 같다. 한국 경제의 부침을 좌우할 만큼 덩치가 커진 삼성을, 편법 승계로 비판받고, 이렇다 할 성공 스토리도 없는 이재용 부회장이 어떻게 끌고 갈지 궁금증도 커간다. 이 부회장이 키를 잡게 될 삼성호는 90년대 초와 마찬가지로 격랑 앞에 놓여 있다. 그의 아버지는 중국의 추격을 받는 한국 기업이 양에서 질로 경쟁력의 중심을 옮겨야 하는 흐름을 잘 짚어 리더십도 강화하고 삼성전자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울 수 있었다.

글로벌 정보기술(IT) 업계에서는 구글, 페이스북, 애플, 아마존 같은 4대 강자가 수천억달러의 자금력을 바탕으로 기업들을 마구 사들이고 있다. 경쟁의 초점은 플랫폼 장악이다. 이를 통해 좀더 많은 사용자 정보를 모으고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 이긴다. 콘텐츠, 플랫폼, 네트워크, 단말기의 구분이 흐려지고 융합되는 흐름 속에서 삼성전자는 더이상 제조업체로 남아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애플의 앱스토어가 보여주듯 새로운 정보기술 생태계는 사람이 모이는 곳에 더 모이고, 그들의 도움으로 협력적 혁신이 일어나는 곳이다. 삼성의 변신도 이런 시대 흐름과 맥이 닿아 있어야 한다. 이전의 성공 경험은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물건 잘 만들면 소비자가 알아줄 것”이란 제조업 마인드로는 애플의 아이폰에 꽂힌 ‘신도’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감성이 품질을 이기는 시대다.

그래서 개방, 공유, 협력 같은 소통의 정신이 이재용 부회장의 삼성에 깃들길 기대한다. 백혈병 사태에 대해 사과하고 해결 의지를 밝힌 데 이어 무노조 경영을 포기하는 것은 사회와 소통의 창문을 여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이봉현 경제·국제 에디터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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