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채 일본 게이센여학원대 국제사회학과 교수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이 5월29일 북-일 두 정부가 일본인 납치 문제 전면 재조사 및 대북 제재의 일부 해제에 합의했다고 발표하였다. 3월 말 일본 방송에 출연해 두 나라가 국내외로 고립돼 있다는 공통점이 있어 이번 북-일 접근은 6월께 합의가 가능할 거라고 무모한(?) 설명을 내놓은 적이 있었지만, 양국의 전격적인 합의 발표에 놀랐다. 하지만 합의문을 보면서 놀라움은 금세 실망으로 바뀌었다. 일본과 북한 당국자들의 고뇌와 변화가 엿보이기는 했지만, 북한의 대일 전략이 완패했다는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북한은 일관되게 한일회담에서의 일본의 식민지배 사죄와 식민지 배상 문제의 결여를 지적해왔다. 하지만 역사인식을 둘러싼 북-일의 입장은 2002년 북-일 정상회담 이후 역전됐다. 한국 사회에서는 의외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전후 일본에는 세 가지 납치사건을 통해 한국 및 북한에 대한 피해의식이 재생산되어왔다.
첫째는 1952년 평화라인(이승만 라인)과 일본인 어부들의 나포였다. 한국전쟁을 벌이던 이승만 정권은 1952년 1월 평화라인을 설정하여 어업권 보장 및 해양주권을 선언했다. 1965년 한-일 어업협정 이후 평화라인이 폐지되기까지 13년 동안 일본 선박 328척, 일본인 어부 등 3929명이 한국 정부에 억류됐다. 하지만 국교가 없는 상태였고, 일본인들은 라디오를 통해 거의 매일 어부들이 나포됐다는 뉴스를 들으면서 피해자로서의 억울한 감정을 억눌러야만 했다.
둘째는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이다. 식민지배와 대량의 강제동원 등을 들어 일본을 납치국가로 비난해온 한국 정부가 야당의 유명 지도자를 일본 땅에서 납치한 사건은 일본 사회에 충격이었다. 일본의 주권이 침해받았다는 문제도 있지만, 한국 정부도 대낮에 납치를 하는 폭력국가이고, 전전의 일본 국가와 다를 바 없다는 대등한(?) 인식을 심어주게 됐다.
마지막으로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다. 일본인 납치피해자 12명 중 7명 사망, 5명 생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미래지향적이고 대국적인 관점에서 내린 통큰 결단이었는지 모르지만, 피해자로서의 역사를 인식해온 일본 사회로서는 그나마 남아 있던 가해자의 역사인식마저 풍화되고 오히려 그동안 쌓여온 불만이 북한에 폭발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재일조선인 시인 김시종이 지적한 것처럼 “일본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의 가해의식의 추구는 이것으로 끝나버렸다”고 할 수 있었다.
북한은 10여년간 일본인 납치자 재조사 요구에 대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일본의 식민지배의 가해 문제를 거론하며 맞서왔다. 이번 북-일 합의문이 북한에 의한 전후 일본인 납치 문제만이 아니라 전전의 일본인 유골 문제, 잔류 일본인, 일본인 처 귀향 문제 등 포괄적인 틀 속에서 일본인 납치 문제를 처리하고자 하는 노력은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북한이 일관되게 주장해온 일본의 가해의식에 대한 추궁은 식민지배의 청구권을 포기하고 경제협력 방식으로 합의한 2002년 북-일 평양선언을 확인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만약 북한이 종래 검토해온 것처럼,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일본인 납치 문제의 동시 해결 등을 포괄적인 재조사의 대상으로 한다는 합의안을 이끌어냈다면 북한은 명분도 얻고 이후 북-일 협상도 좀더 자유롭게 진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김정은 정권은 일본인 납치 문제의 전면 재조사라는 결단을 내렸지만, 그 목적은 경제제재의 해제 및 총련 중앙본부 건물의 매각을 백지화하려는 눈앞의 이해관계를 추구한 측면이 많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시대에 일관되게 주장해온, 일본의 가해의식에 대한 지적을 통한 정통성의 확보는 눈에 띄게 약해졌다. 결국 이번의 북-일 합의는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피해의식에 공식적인 명분을 제공한 백기투항으로도 보인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한국의 피해의식을 국민성의 문제라고 비판하는 이른바 극우성향의 총리 후보가 추천됐다는 씁쓸한 뉴스도 들린다. 그래도 극우는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극우도 극좌도 일본에 투항하는 시대가 도래했는가.
이영채 일본 게이센여학원대 국제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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