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왼쪽)와 길환영 전 KBS 사장
길환영을 해임하자 KBS가 ‘국민의 방송’으로…
문창극을 움켜쥐고 있는 손도 놓기를 바랍니다
문창극을 움켜쥐고 있는 손도 놓기를 바랍니다
곽병찬 대기자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62
한 경상도 친구가 농담처럼 이렇게 말을 합디다. ‘네가 박근혜 대통령을, 조갑제가 야당을 칭찬하면 대한민국이 편해질 텐데….’ 모든 것이 ‘북괴’의 문제로 통하는 극우파인 조씨의 상대편에 저를 세웠으니 기분이 몹시 떨떠름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입장에 따라서는 가까운 친구도 그렇게 보기도 하는구나, 조심해야지…’ 하고 애써 마음을 추스르며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그러면 박 대통령이 잘한 것 한 가지만 이야기해 보게.” 그 친구는 우물쭈물 말꼬리를 흐렸습니다. ‘알아서 할 일이지…’ 그런 표정이었습니다만, 시답잖은 이야기로 자리를 불편하기 만들 일은 아니었습니다. 마침 당신이 총리로 지명한 문창극씨가 했다는 ‘식민지 지배와 6·25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발언이 방송을 타고 퍼지는 중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다른 친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끝났군!” 그 역시 대한민국의 전형적인 50대 후반의 정치적 입장을 취하는 친구였습니다.
솔직히 ‘조갑제’ 운운한 그 친구의 말을 듣고 조금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거짓말이라고 우겨온 것은 아닐까? 그래도 무언가 잘하는 게 있으니, 세상살이를 제법 해왔다는 50대 이상들이 압도적으로 그를 밀고 있는 건 아닐까. 그게 무얼까. 그러나 그런 고민은 문씨의 참극에 가까운 역사인식, 민족의식, 반인륜적 사고를 접하면서 다행히 끝났습니다. 어떻게 하는 일마다 그렇습니까. 일부러 그렇게 하려고 해도 할 수 없을 만큼 곁길로만 빠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세월호 참사’ 이후 네 번이나 눈물을 흘리며 ‘국가개조’ 운운했습니다. 그런데 그 연장에서 나온 게 ‘문창극 지명’이었습니다. 그게 눈물로 국민을 홀리고 난 뒤 꺼낸 국가개조의 청사진이었습니다. 이른바 조중동마저 바꾸고 버리라고 했던 수첩인사, 깨알지시-받아쓰기 리더십, 환관정치, 불통 등 어느 것 하나 버리거나 바꾸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기만 더 빳빳해졌습니다.
문씨의 발언이 <한국방송>을 통해 처음으로 보도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이튿날 아침이었습니다. 이명박 정부 이후 ‘기레기’의 상징으로 간주되던 한국방송 말입니다. 불과 2주 전까지만 해도 ‘북한에 중앙방송, 남한엔 한국방송’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정권의 친위대 노릇을 했던 한국방송이 청와대를 공황에 빠뜨리고 여당을 절망케 한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런 개벽이 있었던 걸까요? 6·4 지방선거 다음날 한국방송 이사회는 길환영 사장 해임제청안을 의결했습니다. 그리고 6월10일 당신은 이사회가 올린 해임제청안을 승인했습니다. 거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겠지만, 당신은 한국방송을 기레기로 만든 길씨를 해임한 것입니다. 이사회가 해임제청안을 의결할 때부터 예상됐던 것이기는 했지만, 공교롭게도 길씨를 해임한 다음날 ‘아베가 임명한 것 같다’는 문씨의 발언을 한국방송이 보도했습니다.
여기에 미치자, 퍼뜩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아, 당신도 잘한 것이 있구나, 앞으로 잘할 수도 있겠구나. 자의든 타이든 당신은 결정적인 순간에 길씨를 해임해 한국방송을 ‘국민의 방송’으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국가의 품격을 지키고, 국민의 뜻에 따르는 ‘국민의 방송’ 말입니다. 물론 한국방송 종사자들은 이런 보도 편성의 자유와 방송의 자율성을 앞으로 얼마나 더 누릴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이라는 건 사실입니다. 정권의 부하들이 어디 방송의 자율성과 중립성으로 무장한 ‘국민의 방송’을 용인하겠습니까?
미래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최근 한국방송의 변화와 그로 말미암은 한국방송에 대한 국민적 평판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변화는 그야말로 극적이었습니다. 성급한 사람들은 한국방송 시청료를 인정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할 정도로 불신은 신뢰로, 미움은 애정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동안 이 정권은 한국방송 시청료 인상에 얼마나 몸 달아 했습니까. 국회에서 밀어붙일 수는 있었지만 국민들의 눈총이 무서워 감히 시도도 못했던 일입니다.
칭찬받기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굳이 잘하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당신이 한국방송의 목덜미를 움켜쥔 손을 놓자마자 그런 변화가 생겼습니다. 한국방송에 가는 신뢰와 애정을 당신도 함께 누려야 할 것입니다. 움켜쥐려고 악을 쓰면 힘이 들고 욕도 먹지만, 제자리에 놓으면 당신도 편하고 칭찬까지 듣게 됩니다. 얼마나 쉬운 일입니까. 그건 다른 국가기관이나 공공기관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모한 권력의 맹목적인 도구로 쓰지 않고, 국민과 국가의 이익에 봉사하는 기관으로 원위치시키면 됩니다. 억지 칭찬을 강요하지 않아도 칭찬은 쏟아질 것이고, 정권은 신뢰를 회복할 겁니다. 문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모르고 지명했지만, 문제가 발견된 이상 이를 철회하면 됩니다. 그를 부둥켜안고 있는 당신의 손만 풀면 당신도 자유로워질 것이고, 신뢰에 손상도 받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당신에겐 그럴 생각이 전혀 없나 봅니다. 문씨 지명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그런 지시를 내리고 중앙아시아로 나가버렸습니다. 없는 동안 총리 임명동의안을 말끔하게 처리하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당신의 충복들은 ‘알고 보니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며 문씨를 두둔하는 쪽으로 돌변했습니다. ‘이판사판 막가자’는 것 아니니냐는 말이 나오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하긴 6·4 지방선거 이후 길환영 사장 해임 이외에 당신이 한 일을 보면 그런 오기와 서슬만 드러납니다. 선거에서 가장 명징하게 나타난 국민의 뜻은 지금의 경쟁 교육, 승자 독식 교육, 이념 편향 교육, 주입식 교육 그리고 교과서 왜곡 따위를 쇄신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 직속의 지방자치발전위원회는 교육감 직선제 폐지안 마련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문씨 같은 이를 총리 후보자로 지명하고, 그와 다를 바 없는 역사관·교육관을 가진 사람을 교육부 장관 후보자와 청와대 수석비서관에 지명하거나 앉혔습니다. 국민들과 맞짱 뜨자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게다가 당신의 짜증은 이제 나라의 기본을 흔들고 있습니다. 횡령·배임 혐의의 파렴치범 한 사람 잡는 데, 얼마나 짜증을 냈으면, 국토방위에 전념해야 할 군대까지 동원하겠습니까. 경찰은 아예 민생치안을 방치하고 있습니다. 서시의 얼굴을 펴게 하려고 군대 몇 번 동원했다가 망한 중국 월나라 이야기가 가볍게 들리지 않습니다.
칭찬받기란 어려운 게 아닙니다. 신뢰를 회복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국가기관과 공공기관이 제자리에서 제구실을 하게 하면 됩니다. 그들의 목덜미를 잡고 있는 손을 놓으면 됩니다. 지금까지 당신이 움켜쥐고 있던 것들이 망가졌거나 망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덕분에 당신도 오기만 남은 채 망가져가고 있다는 사실도 기억하십시오. 방송도 그렇고, 검찰도 그렇고, 군도 그렇고, 국정원도 그렇고…. 원숭이처럼 바나나를 움켜쥐고 있다가는 손을 빼지 못해 사냥꾼에게 잡힙니다. 움켜쥔 손을 놓으시기 바랍니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표창원 “50~80대 선배분들, 다음 세대를 위해 악영향만은 끼치지 말아주십시오”
곽병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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