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현 탐사기획 에디터
미국 연수 시절 치러본 테이크홈(take-home) 방식의 시험이 인상적이었다. 며칠의 시험기간 중 아무 때나 시험지를 받아가서 8시간 안에 답안을 써 내면 됐다. 도서관에서 관련 주제를 다룬 논문을 검색하거나 각종 참고서를 찾아보면서 답안을 작성할 수 있었다. 유의할 점은 두 가지였다. 자료는 얼마든지 참고하되 다른 사람과 상의하거나 도움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어떤 자료에서 어떤 부분을 참고했는지 철저히 밝히라는 것.
마치 시험을 치는 행위를 통해 학문의 윤리적 태도를 시험하는 듯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평소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협업하는 풍토였지만 이때만큼은 간단한 인사말 외에는 대화를 자제했다. 규칙을 어겼다는 오해를 사는 것조차 꺼리는 듯했다. 특히 남의 지식을 이용할 때 지켜야 하는 규칙은 결벽증처럼 느껴질 정도로 엄격했다. 논문이나 리포트를 쓸 때 참고한 자료를 어떻게 적시해야 하는지 규정한 안내서가 두툼한 책 분량이었다. 글쓰기 과목의 첫 수업부터 교수는 석사학위 논문에서 단 한 개의 문단이 표절로 밝혀져 학위가 취소된 사례를 들먹이며 학생들을 ‘협박’했다. 자신은 물론 제3자의 학문적 부정행위도 묵인하지 않을 것이며 위반시 최고 퇴학에 이르는 징계를 감수하겠다는 ‘명예선서’를 입학식 때 했는데, 그게 요식행위가 아니었음을 알아가게 됐다.
물론 이런 윤리 규칙들은 우리나라에서도 강조된다. 그런데 툭하면 표절 의혹을 받는 이들이 교육을 관장하는 장관직에 지명되는 현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저 규칙들을 통해 지켜내고자 하는 근본적인 가치에 대한 성찰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흡연의 유해성을 체감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각종 금연 규칙이 그저 거추장스런 장애물로만 여겨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학문의 윤리 규칙을 떠받치는 가치는 무엇일까.
토론 수업 도중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는 “이 생각은 내 거야”라고 덧붙이는 미국인 학생을 보고 처음엔 생뚱맞다는 느낌이었다. 대단할 것도 없는 의견을 내면서, 거기에 일말이나마 자신만의 생각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그 독창성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학생만 유별난 건 아니었다. 강의·토론·글쓰기 등 교육의 모든 과정을 통해, 남의 지식을 훔치지 말라고 강조하는 것 이상으로 자신만의 생각이나 발견을 추구하라고 끊임없이 주문했다. 사실 논문을 쓸 때 남들의 글에서 인용한 부분을 낱낱이 밝히는 것은 그들의 독창적인 성취를 존중하는 행위이자, 역으로 보면 그 논문에서 저자만의 창의적인 지점이 어디인지를 (인용부호 없이 씀으로써)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런 독창성·창의성의 집적이 세계 유수의 대학들을 키우고 그 나라 국력의 바탕을 이룬 게 아닐까 싶었다. 표절은 바로 그 독창성·창의성에 대한 부정이기에 제대로 된 대학, 제대로 된 나라에서는 그토록 경멸과 경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표절을 뜻하는 영어 단어(plagiarism)의 어원이 납치범을 뜻하는 라틴어(plagiarius)라고 하니, 표절은 단지 지식의 절도에 그치지 않고 인간 정신의 창조성 자체를 납치하는 행위라고 비유할 만하다.
이제 우리는 학문의 창의성을 희생시켜 교수 자리를 얻어낸 인물에게 나라의 백년대계를 맡겨야 할 처지다. 그를 교육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한 박근혜 대통령은 ‘창조’를 유독 강조해왔다. 김명수 후보자를 끝내 장관에 임명하는 건 자기부정일 뿐 아니라 우리 미래마저 창조의 빛이 차단된 골방에 가두는 일임을 대통령은 알아야 한다.
박용현 탐사기획 에디터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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