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30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다소 긴 모두발언을 마친뒤 물을 마시고 있다. 2014.06.30 /청와대사진기자단
당신의 득표력 때문에 미우나 고우나 죽는 시늉이라도 했으나
민심 이반 나타나자 자칭 ‘원조 친박’들조차 제 살길 찾아 나서
민심 이반 나타나자 자칭 ‘원조 친박’들조차 제 살길 찾아 나서
곽병찬 대기자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64
“국정 시행 능력이나 종합적 자질보다 신상털기식, 여론재판식 여론이 반복돼… 높아진 검증 기준을 통과할 분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당신이 오늘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밝힌 정홍원 총리 유임 배경인데, 해명인지 화풀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뒤따른 발언을 보면 금방 궁금증이 풀립니다.
“…국회는 인재가 나라에 봉사할 수 있도록 인사청문회 개선 방안을 모색해 주시기 바랍니다.” 총리를 고르지 못한 게 인사청문회 제도가 잘못됐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저의 잘못을 인정하고 바꿀 것인지…. 도대체 이렇게 총리 후보를 고르지 못해 국정 공백을 초래했던 적이 있었던가요? 그리고 그것을 인사청문회 제도 탓이라고 돌린 대통령이 있었습니까?
다시 한 번 조선시대 대과에서 왕이 직접 묻고 예비합격자가 답하는 장면 하나를 더 소개합니다. 조선의 성군 세종이 묻고, 성종 연간 우찬성·좌찬성을 지낸 강희맹이 답한 시대의 현안에 대한 시무책 곧 책문입니다. 세종 29년 별시에서였습니다. “정치가 문화를 숭상하면 학문을 높이고, 정치가 무력을 숭상하면 무용을 귀하게 여긴다. 이를 근거로 따져보면, 인재는 근본적으로 정치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 인재를 등용하고, 인재를 양성하며, 인재를 분별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강희맹이 답했습니다. “…나라가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발단은 모두 어떻게 인재를 양성하고 가려서 쓰는가 하는 데 달려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아래로 미천한 선비와 학문이 미숙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마음을 텅 비우고 널리 불러들여, 경전을 강론하면서 진리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한 사람이라도 좋은 사람을 얻으면, 큰 재목은 크게 이루어지고, 작은 재목은 작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임금은 마땅히 교화를 숭상해서 현명한 사람을 널리 불러 모으고, 마음을 밝게 해서 인재를 분별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을 비우고 인재를 등용해서 변화하는 추세에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대처해서는 안 됩니다.”
“임금이 인재를 알아보지 못할 때 인재를 알아보는 방법을 찾아야 하고, 인재가 임금과 맞지 않을 때 통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전적으로 임무를 맡기고 성공을 책임지게 한다면, 아래에는 공경하지 않을 신하가 없을 것입니다. 마음에 맞는 사람만 등용하고 다른 사람을 버린다면, 사람들은 결국 임금이 좋아하는 것에 감정을 맞추고, 임금이 숭상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 임금의 욕구에만 맞추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간사한 것이 생겨나고 혼란이 자라납니다.”
“세상에 완전한 재능을 갖춘 사람은 없지만, 적합한 자리에 기용한다면 누구라도 재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재능 있는 사람만 찾아서는 안 됩니다. 장점을 취하면 누구라도 쓸 수가 있습니다. 아주 어리석은 사람을 완전히 뜯어고칠 수는 없습니다만, 단점만 보완하면 누구라도 쓸 수가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인재는 성인이라는 뛰어난 대장장이가 빚어내는 데 따라 여러 가지 그릇으로 바뀐다.’”
560여년 전 약관 23살의 강희맹이 올린 시무책입니다. 그가 당신의 인사를 보았다면 어떤 말을 했을까요. 오늘 당신이 한 말을 들었다면 어떻게 꾸짖었을까요.
지금 진행중인 새누리당 대표 경선에서 서청원 의원은 통합과 소통을, 김무성 의원은 탕평 인사를 들고나왔습니다. 모두 ‘원조 친박’을 자처하는 이들이 왜 그런 캐치프레이즈를 걸었을까요?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통합과 소통, 그리고 탕평은 다름 아닌 당신에게 가장 결핍된 것입니다. 그들은 당신에게 가장 부족한 덕목을 브랜드로 삼아 표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당신의 영향력이 압도적인 당내 경선에서 말입니다. 불과 한달 전까지만 해도 오로지 당신을 팔아 선거를 치렀던 이들이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아실 겁니다. 당신은 이미 극복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보스를 선택하는 데 가장 중요한 조건들이 있습니다. 공천이건 자리건 출세를 보장해줄 권력이 있을 것이고, 선거에 필요한 자금까지 지원해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득표에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입니다. 제아무리 신념이 투철한 정치인이라도, 선거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 득표는커녕 감표 효과만 있는 사람에게 충성을 바칠 리 없습니다.
이른바 ‘친박’이 이명박 전 대통령 집권 5년 동안 변함 없이 강고한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당신의 득표력 때문이었습니다. ‘세월호 참사’라는 거대한 쓰나미 앞에서도 새누리당이 오로지 당신에게 기댔던 것은 당신의 바로 그 득표력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당신은 모든 선거에서 가장 확실한 득표원이었기 때문에 새누리당은 미우나 고우나, 잘하건 못하건, 당신 앞에서 죽는 시늉이라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바뀌고 있나 봅니다. 여러 여론조사에서 당신의 국정 운영에 대한 긍정 답변이 부정 답변을 밑도는 쪽으로 역전됐습니다. 완만하지만 부정적인 여론은 절반을 넘어가고, 긍정 여론은 40% 선을 간신히 지키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이라면 이제 당신의 모자란 점, 부정적인 점을 지적하고, 극복을 약속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그건 무엇보다 당신의 지지 집단이 흔들리기 때문일 겁니다.
지금처럼 경질된 총리를 다시 기용하는 ‘배째라’ 식의 국정 운영 앞에서, 매사에 국민과 싸워 이기려 드는 당신의 오만 앞에서 누가 당신을 지지할 수 있겠습니까. ‘양친을 흉탄에 잃은 불쌍한 박근혜’에 대한 동정심이나 부채감도 당신을 대통령에 뽑아준 것으로 많이 상쇄된 터입니다.
통합, 소통, 탕평 세 가지 덕목은 모두 인사를 통해 드러납니다. 김무성 의원의 이야기대로 권력 서열 10위까지 9명 모두 영남 인사로 채워졌다면 통합은 물건너갔고, 탕평이란 무너졌으며, 소통은 막힌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인사 때마다 수첩을 던져라, 귀를 열어라 따위의 요청이 빗발쳤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은 부친 피살 이후, 가까이에서 보필하던 사람들까지 등을 돌린 것에 크게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알고 있는 소수의 사람만 믿고, 그밖의 대다수 사람들은 불신하는 게 ‘천석고황’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도자로서는 치명적인 결격 사유입니다. 1년 반 만에 총리 후보 하나 찾지 못하고 허둥대는 오늘의 모습은 바로 그 결과일 겁니다.
10·26 이후 가신들조차 박정희와 유신체제에 등을 돌린 것은 그들이 약삭빨라서가 아니라, 박정희와 유신체제의 잘못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의 시대정신은 유신의 극복과 유신 잔재의 일소였습니다. 만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국민의 사랑을 받았고, 그리하여 죽어서도 득표에 도움이 되었다면 어떤 정치인이 그를 버렸겠습니까. 영원할 것만 같았던 당신의 충복들도 바야흐로 제 살길을 찾아 나서려는 것은 그들의 약삭빠름 때문이 아니라 바로 당신의 분열·불통·편협으로 말미암은 민심 이반 때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강희맹이 지금 살아 있다면 당신에게 이 한마디만 했을 것입니다. “마음에 맞는 사람만 등용하고 다른 사람을 버린다면, …여기서 간사한 것이 생겨나고 혼란이 자라납니다.” 다른 대책은 당신에게 하나 마나 한 소리일 겁니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노유진 “‘인사 참극’ 청와대, 홈페이지에 구인·구직 게시판 열어야” [한겨레담]
곽병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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