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희 국제부장
중국 베이징 남서쪽 융딩강 위의 루거우차오(노구교)는 난간 위 수백마리 돌사자상의 생생한 표정이 인상적인 다리다. 마르코 폴로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묘사했다. 하지만 1937년 7월7일 밤 일본군이 병사 실종 사건을 핑계 삼아 이 다리를 점령하면서 본격적으로 중국 침략에 나섰으니 동아시아 역사를 바꾼 현장이기도 하다.
77년이 흐른 지난 7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이 다리 옆에 세워진 인민항일전쟁기념관에서 “일본 침략자들은 무력으로 중국을 병탄하려는 야심을 이루려고 루거우차오 사건을 저질렀다”, “지금도 수천만명의 무고한 희생을 무시하고 침략의 역사를 미화하고 있다”며 일본 군국주의 역사와 아베 정권의 현재를 강하게 비판했다.
시진핑 주석의 4일 서울대 강연도 역사 강의를 방불케 했다. “임진왜란에서 (한·중) 양국 국민은 적개심을 품고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전쟁터로 향했다”, “청일전쟁이 치열했을 때 (한·중은) 생사를 다 바쳐 서로 도왔다”….
시진핑의 중국이 역사를 다리 삼아 한국을 끌어당기는 동안, 미국의 동아시아에 대한 몰역사성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경제·군사적으로 힘이 부치는 미국은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려면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동맹인 일본에 힘을 실어주면 된다고 판단한다. 아베 정권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해 미국과 함께 ‘싸울 수 있는 일본’을 만들도록 부추긴다. 그 과정에서 일본 우익들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과를 훼손하고 역사·영토 문제에 도발적인 태도를 보이는 상황은 눈감겠다는 태도다. 고노담화 검증과 집단적 자위권 정도는 한국이 참고 일본과 협력하라는 요구다.
2차 세계대전 뒤 일본의 침략 책임을 철저히 단죄하지 않고 전범들을 활용했던 미국은 이번에도 ‘전략적 이익’만 따지면서 동아시아인들 마음속의 상처와 분노, 민족주의를 제대로 헤아리지 않는다. 일본의 침략 역사를 떠올리며 군국주의화를 우려하는 이들의 정서를 미국이 고려하지 않는다면, 일본의 군사력을 앞세우고 미사일방어(MD) 등으로 중국을 막으려는 시도는 한계에 부닥칠 것이다.
시진핑 주석은 한·중 ‘역사 공조’로 미국의 한·미·일 군사협력 전략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의 역사 강의에선 빠진 것이 있다. 그는 임진왜란과 청일전쟁은 이야기했으나 병자호란, 수·당의 고구려 침공, 청나라 말 원세개(위안스카이)가 조선에서 보인 식민지 총독 같은 행태는 말하지 않았다.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전통적 영향력을 회복한 이후를 우려하는 이들에게 중국이 답해야 할 질문도 많이 남아 있다.
냉전시대의 이념·동맹 구도가 흔들리고, 강대국간 권력 이동은 예상보다 훨씬 숨가쁘게 진행중이다. 강대국들 사이에 끼인 한반도 주변에서 이런 역사적 전환이 벌어질 때마다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한 지도자들의 잘못된 대응으로 이 땅의 사람들은 너무나 큰 고통을 겪어왔다.
그 역사적 교훈 앞에서 박근혜 정부의 대응은 어떠한가. 미국의 요구대로 미사일방어체제에 빨려들어가고 있다는 우려가 크다.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결정한 직후 한·미·일 합참의장 회의에 나가 일본과 안보협력을 논의했다. 한-중 정상회담 공동선언에선 미국을 의식해 일본 문제에 침묵을 지켰다가 시진핑 주석이 한국을 떠나기 직전 청와대가 슬그머니 나서 한·중 정상이 오찬에서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등을 비판했다고 발표했다. 시진핑 주석이 북한보다 먼저 한국에 온다며 떠들썩하게 홍보했지만, 정작 북핵 문제와 남북관계 개선 해법을 찾는 일은 오리무중이다.
갈팡질팡하는 정부를 보다가,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에 대한 책을 들춰보며 한숨짓는다는 이들이 많다.
박민희 국제부장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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