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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민편집인의 눈] 일탈, 그리고 무지 / 고영재

등록 2014-07-24 18:46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디지털 파고에 맞서 ‘한겨레’ 취재·제작과정 새롭게 바꿔야
기자 절반을 놀게 해보라…알량한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라
미국의 한 업체가 ‘10대 몰락 직종’을 예고해 뭇 사람의 눈길을 끌었다. 신문기자도 ‘위기의 직업’ 4위에 올랐다. 신문의 불안한 운명이 예고된 지는 꽤 오래다. 디지털 문명의 소용돌이가 빠르고 거센 터다. 시대의 파수꾼, <한겨레>도 그 화려했던 무대에서 속절없이 사라지고 말 것인가.

그러나 결코 아니다. 한겨레가 짊어진 시대적 책무가 막중하다. 그 책무는 두 가지다. 하나는 ‘디지털 시대의 혼돈’을 통찰하고 이를 바로잡는 ‘아날로그 신문’의 역할이요, 다른 하나는 ‘언론’이 실종된 대한민국의 특이한 상황이 부여한 소명이다.

디지털은 빛과 어둠을 지닌 양날의 칼이다. 필자는 디지털 문명을 ‘창조성의 적’으로 규정한 바 있다.(2월28일치 시민편집인의 눈) ‘인간이 지닌 창조정신의 산물이 인류의 독창성을 좀먹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이 아이러니는 인류의 지속가능성, 존망과 관련된 무서운 화두다.

디지털의 최대 강점, ‘속도’ 역시 위험한 속성이다. 하루가 다르게 선보이는 디지털 기기는 이용자들의 찬탄을 자아낸다. 디지털 기술은 아이들의 놀이에서부터 인간 사이의 소통 방식, 인간관계 맺기 문화까지 하루아침에 바꿔놓는다. 고용 시장의 변화를 포함한 경제 시스템의 변혁, 디지털 정치 등 전방위적으로 디지털 기술은 위세를 떨친다.

문제는 그 속도가 디지털 문화의 검증기회를 원천적으로 막고 있다는 점이다. 새로운 기기의 기능, 그 강점과 약점을 차분하게 검증할 겨를 없이 새로운 기기, 새로운 풍조가 등장한다. 이 부문에서 정부는 그 역할이 거의 없다. 제도나 전문성에서 준비가 채 안 된 터다. 기업이 앞장서 사회적 반작용을 걱정할 리 있는가. 더구나 지구촌 경제체제에서 디지털의 비중은 너무 커졌다.

인류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채 방향도 모르고 달려가는 형국에 놓인 셈이다. 한겨레가 최근 설립한 ‘사람과디지털연구소’의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아날로그 신문엔 아직 의미심장한 권리와 책무가 남아 있다. 21세기를 지배하고 있는 디지털 문명의 빛과 그림자를 차분하게 조명할.

‘참언론’의 절박성을 여기서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뭔가 가슴을 짓누르는 응어리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이 땅에 많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생각한다.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나. 정치를 제대로 하나. 팍팍한 살림살이는 언제나 풀리려나. 또 어인 일로 괴이한 사건들은 잇달아 터지는가. 그럼에도 왜 변신의 노력은 눈에 띄지 않는가. 대한민국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살아있는가. 고위 공직자 후보들은 도대체 왜, 보통 사람들의 도덕적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가. 대통령 말은 믿어도 되는가.”

한겨레가 존재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그러나 ‘디지털 난국’을 돌파하는 길이 결코 만만치 않다. 신문들은 이미 다양한 지면 개선 노력으로 디지털 파고에 대응하고 있는 터다. 국외자로서, 지면 혁신의 구체적 방안을 말할 능력도 자격도 없다. 그래도 분명한 것 한 가지가 있다. 유일한 탈출구는 ‘환골탈태’(換骨奪胎)에 있다는 점이다. 뼈대는 물론 디엔에이(DNA)까지 바꾸지 않으면 활로는 결코 열리지 않을 터.

환골탈태의 길을 묻는다면 물론 막막할 따름이다. 다만 필자는 ‘무식한 직관’으로 두 갈래 길을 제시한다. 하나는 ‘일탈’(逸脫)의 길이요, 둘은 ‘무지’(無知)의 길이다.

일탈은 물론 반사회적 행위다. 일탈은 ‘사회적인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 시대는 새로운 규범을 요구하는 법. 오늘 신문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급격한 언론환경의 변화에 직면하고 있다. 신문의 일탈은 불가피한 선택이다.

일탈의 첫걸음은 기존의 규범을 백지로 돌려놓는 일이다. 그 백지 위에 신문의 존재 의의에서부터 내용, 취재 시스템, 제작 과정, 유통체계를 재설계하는 작업이 급선무다. 서까래 몇 개 갈아 끼우는 집으로는 디지털 시대 풍우를 견딜 수 없다. 집을 헐고 다시 세우되, 전혀 다른 개념의 집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일탈은 자유로운 상상력의 든든한 밑천이기도 하다. 뉴턴이 실험실에서 갇혀 지냈다면, 그 ‘사과’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일상에서 탈출해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도 창조적 일꾼에게는 유용한 덕목이다.

여기서 한겨레에 ‘위험한 도박’을 제안한다. 한겨레 구성원의 상당 부분을 ‘일상에서 해방된 인력’으로 운용하는 것이 그것이다. 기자의 절반을 놀릴 수도 있다. 그들은 자유롭게 쉬면서, 취재 부담 없이 세상을 돌아볼 수 있다. 다만 새 신문의 그 ‘백지 설계도’를 염두에 두면서. 비현실적인 방안이라는 비판이 벌써 빗발치는 듯하다. 그러나 존망의 위기 타개책을 찾는 일이라면 못할 것도 없다. 절반 인력을 놀리는 게 과격하다면 10분의 1은 어떤가.

독자들은 속속 신문을 떠나고 있다. 특히 젊은 독자들의 외면은 치명적이다. 젊은 독자들의 유입이 없다면 신문의 지속가능성도 없다. 전혀 다른 신문이 아니면 결코 이들을 되돌아오게 할 수 없다.

일탈은 익숙한 관행으로부터의 해방이기도 하다. 무릇 관행은 안일을 부추기는 법. 이제껏 언론은 언론소비자들에게 정보를 일방적으로 제공해 왔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 소비자들은 능동적이고 취향도 발랄하다. 출입처 중심의 취재 시스템도 폐기처분할 때에 이르렀다고 판단한다.

고영재 언론인·전 경향신문사 사장
고영재 언론인·전 경향신문사 사장
‘무지’는 아는 것이나 지식이 없음을 뜻한다. 미련하고 어리석음을 이르기도 한다. 이는 첨단지식·정보 산업에 어울리지 않는 덕목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진정 큰 지혜는 지식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는 겸허함 속에 깃드는 법.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선인들의 통찰은 언제나 신선하다.

알량한 지식이나 전문성은 상상의 날갯짓을 훼방하기 마련이다. 그것들은 편견의 온상이기도 하다. 오히려 비전문가의 하찮은 의견 속에 해답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믿는다. ‘듣도 보도 못한 새 신문’은 지식의 힘으로는 태어날 수 없다. 앞으로 성공적인 새 시대의 신문이 등장한다면, 그것은 지식의 산물 아닌 직관의 창작품이 될 것이다.

고영재 언론인·전 경향신문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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