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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또 하나의 비극 / 박용현

등록 2014-07-27 18:28

박용현 탐사기획 에디터
박용현 탐사기획 에디터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신간 저서에서 ‘일’에 대한 경제학의 무관심을 비판한다. 일은 “물려받는 방법을 제외하면 돈을 소유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삶을 가장 크게 좌우하는 중요한 부면”인데도 “경제학에서 일은 정신이 이상해서 숨기고 싶은 창피한 친척 아저씨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고 한다.

그들은 바로 그 ‘일’을 하러 갔을 뿐이다. 가정을 꾸려나가기 위해서든, 동생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서든, 그 자신이 먹고살기 위해서든 일은 유일한 선택지였다. 그 일터에서 각종 유해 화학물질을 다뤄야 했다. 대개는 어떤 물질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일했다. 알았던들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그러다 병을 얻었다. 백혈병에도 걸리고 악성 종양이 생기기도 했다. 끝내 어린 아들딸을 남겨두고, 가엾은 아내에게 고통의 나날을 남겨주고, 부모 가슴에 한을 새기고 눈을 감아야 했다. 일을 통해 멋지게 장식하고 싶었던 미래도 그들과 함께 땅에 묻혔다. 그들로서는 피할 길조차 없었던 ‘일의 비극’이다.

여기에 무관심한 건 경제학뿐만이 아니다. 현실의 제도와 법과 기업도 마찬가지다.

일터의 위험에 대한 안전장치로 마련된 산재보험 제도는 올해로 시행 50년을 맞았지만 여전히 미숙하다. 일하다 질병을 얻었을 때 산재로 인정받으려면 작업환경과의 연관성을 노동자 쪽이 입증해야 한다. 그러자면 작업환경에 대한 조사자료가 필요한데, 그런 자료는 아예 없거나 있더라도 회사 쪽이 내주지 않는 게 다반사다. 노동자 스스로 기록을 남겨뒀을 리도 없다. 그들은 그저 열심히 일했을 뿐이다.

이런 현실을 고려해, 입증 책임을 회사 쪽으로 돌리자는 대안이 제시돼 왔다. 작업환경과 질병 사이에 연관이 없음을 회사 쪽이 입증하지 못하면 산재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도 2012년 이렇게 권고했다. 하지만 정부와 국회는 요지부동이고, 법원도 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그대로 승인하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처럼 부실한 제도마저 이용할 기회가 가로막히는 현실이다. 회사 쪽은 온갖 수단을 써 산재 신청을 훼방한다. 개인들로선 회사에 맞서기가 두렵다. 어쩌면 병을 얻고 죽어간 이들을 가장 비극적으로 만드는 게 이 지점이다. 청춘을 바친 일터로부터 냉혹한 외면을 당하는 심정이 어떻겠는가. 산재를 은폐한 덕에 회사는 번듯한 이미지를 유지하고, 막대한 산재 보험료 감면 혜택도 받는다.

이런 요지경이 ‘삼성 백혈병 문제’의 배경을 이룬다. 7년여에 걸친 피해자와 유족들의 고군분투로 겨우 삼성과의 협상 테이블이 마련됐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한겨레> 취재 결과, 또 하나의 반도체 사업체인 하이닉스에서도 똑같은 비극이 반복돼 왔고 지금도 반복되고 있음이 확인됐다. 하이닉스는 올 상반기 영업이익이 2조원을 넘어섰다. 그 빛나는 수치 이면에는 백혈병, 악성 종양 등으로 숨지거나 투병 중인 노동자들의 슬픈 이야기가 숨어 있다.

반도체 제조라인은 ‘클린룸’으로 불리는데, 직업병 소송을 전문으로 하는 미국의 한 로펌은 이를 ‘첨단산업 시대의 탄광’에 비유한다.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그 시대 산업의 근간을 이루는 생산기지이자 위험이 상존하는 일터라는 공통점을 잘 짚어낸 비유다. 붕괴사고와 진폐증의 위험을 무릅쓰며 우리 경제에 이바지해온 탄광 노동자들처럼, 클린룸 노동자들도 그 희생에 대한 응당한 보상과 존중을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는 우리 모두의 삶의 기반인 ‘일’을 더 안전하고 보람있게 만들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박용현 탐사기획 에디터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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